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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진짜 디스토피아로부터

최근 제 신상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tbs 교통방송에서 제가 진행하던 <김남훈의 SNS쇼>가 봄 개편을 맞이해 하차를 했습니다.

지난해 이맘때 새로 생긴 프로그램이었는데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소재로 삼는 매우 혁신적인 라디오 프로그램이었죠. 매일 생방송으로 진행을 하다보니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재미도 만만치 않았던 프로그램인데 참 많이 아쉽더군요. 마침 그때 야간대학원에 입학을 한 상태였는데 출연 결정이 너무 갑작스럽게 나는 바람에 휴학도 하지 못하고 대학원 전 과목 F를 맞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학비는 학비대로 날아갔고요.

방송가에서는 3월에 봄 개편을 합니다. 이 시기에는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나기 마련이지요. 저는 라디오 진행을 하면서 다른 프로그램에 게스트로도 출연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했던 것이, 2년 넘게 했던 MBC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입니다. 토요일 코너인 ‘주간 이슈 뒤집기 한판’인데 이번에 아예 토요일 방송이 없어지면서 폐지가 되었죠.

그러고 보니 라디오와 참 인연이 많습니다. 제가 처음 방송을 경험했던 것도 라디오였습니다. 지금은 세기가 아예 다른 1999년 <김흥국 정선희의 특급작전>의 인터넷 검색어 순위를 가지고 토크를 나누는 코너에 게스트로 고정출연을 했었지요. 그리고 2년 뒤에 <김남훈의 월드넷 영파워>라는 프로그램으로 라디오 진행자로 데뷔하게 됩니다. 게스트 출연을 1년 남짓 한 사람이 어떻게 라디오 진행자로, 그것도 <별이 빛나는 밤에>와 <여성시대> 등으로 잘 알려진 전통의 강호 95.9mhz MBC 라디오에 전격 발탁됐는지 저도 의문입니다. 전 소속사도 없었고 높은 사람들에게 로비는커녕 커피 한잔을 산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누군가가 저를 아주 잘 봤거나 그만큼 인력풀이 좁았거나 둘 중 하나겠지요. 생각해보니 그때 제가 28살. 프로레슬러로 데뷔를 하고 한달 뒤엔 라디오 진행자로도 데뷔를 한 것이죠.

소년 시절 친구네 집이었던 서울우유집 안방에서 <AFKN>을 통해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헐크 호건의 어마어마한 팔뚝 그리고 사춘기 때 집에선 더블데크로 독서실에선 마이마이로 몰래 듣던 <별이 빛나는 밤에>. 프로레슬링과 라디오라는 판타지의 세계를 제 일상으로 만든 20대 후반의 가을은 정말 엄청났습니다. 프로레슬링 훈련으로 다져진 강인한 육체, 그리고 당시 다니고 있던 직장 <딴지일보>에서 나오는 급여와 라디오 출연료까지. 당시에 저는 강남의 독신귀족으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미인대회 3등 이하와는 연락처 교환도 하지 않았지요. 경제적 능력도 되는 데다가 제가 얼굴도 잘생긴 편이었으니까요. 말도 안되는 너스레를 잠깐 떨어봤습니다만 정말로 정말로!

<씨네21>의 마감에 맞추어 아이패드 미니에 블루투스 키보드를 연결해 원고를 정리하던 중에 제가 해설을 맡고 있던 케이블 채널의 프로레슬링 프로그램이 폐지된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3월 한달 동안 일주일에 하나씩 프로그램이 없어졌고 덕분에 제 고정 수입의 90%가 같이 증발했습니다. 남쪽지방에서는 지금 매화가 핀다는데 저는 진짜 겨울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이 코너의 제목이 ‘디스토피아로부터’죠? 네. 정말 저는 지금 디스토피아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마흔이 다 된 나이에 다시 아무것도 아닌 27살로 돌아간 듯합니다. 하지만 <터미네이터>를 비롯해서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들에서 항상 묘사되듯이 ‘라디오’는 생존자 최후의 희망입니다. 전 그 희망을 계속 가져볼까 합니다. <씨네21>을 즐겨보시는 훌륭한 독자님들 가운데 참신한 진행자를 원하신다면 연락주세요. 여기 준비된 방송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게스트도 좋고요. 원고 청탁도 좋습니다. 까짓 경기 해설이나 아니 직접 시합 출전도 가능합니다. 불러만! 불러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