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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전영객잔] 그녀는 우리와 섞이지 않는다

<스토커>의 인디아는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의 주인공들과 어떻게 다른가

※<스토커>의 결말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습니다.

이십세기 폭스 서치라이트 로고가 깔리는 박찬욱의 영화를 한국의 극장에서 보는 경험은 좋기도 하고 낯설기도 하다. 박찬욱이 연출하고 정정훈이 촬영했지만 이것은 니콜 키드먼과 미아 바시코프스카와 매튜 구드가 주연하고 할리우드의 자본과 기술력이 들어간 할리우드영화다. 박찬욱의 영화가 보여주는 형식적 미감과 관객을 습격하는 윤리적 동요의 기운은 <스토커>에서도 여전하다. 훨씬 세련되고 단정하며 여운도 만만치 않다. 동시에 송강호, 최민식, 이영애, 임수정 등이 나오는 박찬욱의 한국영화에서 느꼈던 윤리적 동요보다는 충격이 덜하다. <스토커>는 간단히 정리하면 불온한 피를 타고난 가족의 얘기다. 미친 삼촌이 돌아오고 그 삼촌에게 여주인공 인디아(미아 바스코프스카)는 근친적 욕망을 느낀다. 삼촌 찰리(매튜 구드)는 그녀의 욕망을 격발하는 존재이다. 그녀의 욕망에는 성욕뿐만 아니라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로 접착된 살인에의 욕망도 포함된다. 인디아의 에너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함께 다닌 사냥으로도 채 연소되지 않았고 앞으로 더 폭발적으로 폭발할 일만 남았다. 이 영화는 인디아가 자신의 불온한 피의 정체성을 깨닫고 괴물 단독자로 서는 얘기를 다룬다. 스토커 가문을 무대로 매우 폐쇄적인 실내극처럼 전개되는 이 영화에서 더 큰 밑그림을 그리기는 어렵다. 이게 한국영화였다면, 여하튼 한국사회를 배경으로 한다는 이유만으로 적지 않은 충격을 한국의 관객에게 줬을 것이다. 미아 바시코프스카의 이국적인 외모는 이런 충격을 상당 부분 불식시킨다.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금기의 위반에 관한 구체적인 시각적 세부묘사를 제시하는 것 정도로, 물론 그 시각적 세부묘사가 충분히 매혹을 주긴 하지만 이 영화는 자기 발걸음을 그친다. 영화의 말미에 미치광이 찰리 삼촌에 비해 훨씬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될 듯한 인디아를 보는 마음은 그래서 처음에는 좀 어리둥절하다. 여기서 끝인건가? 아니면 속편이 나오는 건가? 괴물이 된 인디아의 아름다운 모습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스토커’라는 열쇳말의 의미

이야기의 플롯은 단순하지만 박찬욱은 그 단순한 플롯에 촘촘하게 자기식의 코드를 기입해 놓았다. 히치콕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내용이나 스타일뿐만 아니라 스토커를 떠올리게 하는 작명에 숨어 있는 언어유희에서도 드러난다. 스토커(Stoker)는 여주인공 인디아의 성이다. 인디아 스토커 집안에 찰리 스토커가 오는 게 이야기의 발단인데, 초/중반 상당 시간 동안 찰리는 스토커(stalker)처럼 인디아를 쫓아다닌다. 찰리는 인디아의 학교에도 찾아오고 집 안에서도 곧잘 그녀의 동선을 가로막고 나선다. 인디아를 따라다니는 것과 동시에 은근히 인디아를 자극하기 위해 인디아의 엄마이자 형수인 이블린(니콜 키드먼)을 유혹하기도 한다. 인디아는 결과적으로 그의 스토킹과 유혹에 넘어간다. 찰리의 살인을 목격, 방조함으로써 공범이 되고 이 비밀을 공유하면서 욕망의 경쟁자인 엄마를 제치고 그의 연인이 될 듯한 위치에 오른다. 인디아가 어렸을 적부터 찰리가 보내온 같은 모양의 구두는 그녀의 욕망을 잡아당겨 꺼내는 오브제이다. 그녀가 18살 어른이 됐을 때 찰리가 찾아오고 찰리는 이제 그녀에게 단화가 아닌 하이힐을 선물한다. 인디아가 하이힐을 신었을 때 게임은 끝난다. 그녀는 허물을 벗은 애벌레처럼 단독자로 곧게 선다. 찰리 삼촌 못지않은 무시무시한 괴물이 된다. 그녀는 영화 말미에 찰리를 죽이고 거리로 나오며 속도위반을 제지하는 경찰을 살해하고 벌판에 선다. 죽은 아버지의 벨트, 삼촌이 그동안 차고 있던 벨트를 매고서 벌판을 바라보며 자기 존재를 시위하듯 서 있는 그녀의 마지막 이미지는 스토커에게 스토킹당하고 스토커에게 매혹당했다가 스토커를 처단하고 홀로 선 성인 여자의 모습이다.

이미 다른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스토커’는 또다른 언어유희를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드라큘라>를 쓴 브람 스토커의 성과 철자가 같다는 점에서, ‘스토커’는 어른 뱀파이어가 소녀 뱀파이어를 유혹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얘기의 열쇳말처럼 작동하는 건 아닐까. 굳이 그 맥락을 하릴없이 상상하게 만든다. 인디아는 삼촌을 통해 자신의 나쁜 피를 깨닫는다. 영화 초반, 삼촌 찰리가 인디아의 고모할머니를 살해할 때 화면은 크로스커팅으로 저택 지하실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는 인디아를 보여준다. 인디아는 거기서 이미 죽은 채 냉동보관 돼 있는 고모할머니의 변색된 얼굴을 본다. 찰리의 살인과 인디아의 심리적 공모관계를 크로스커팅이라는 영화적 논리와 감성으로 잇는 이 장치는 나중에 삼촌이 살인하는 것을 목격하고 쾌락에 떠는 인디아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영화 중반, 삼촌과 엄마가 지분거리는 광경을 목격한 뒤 인디아가 거리로 나와 불량한 고교 등급생 남자아이를 만나 숲 한가운데 놀이터에서 사내아이의 달뜬 욕정을 거부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삼촌이 나와 그 아이를 처단한다. 사내아이는 누워 있는 인디아를 공격하려 하고 등 뒤에서 찰리 삼촌이 벨트로 그의 목을 조를 때 인디아는 부르르 떠는 사내아이의 몸을 느끼며 그의 얼굴을 마주한다. 처음에 이 장면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으며 인디아가 집으로 돌아와 옷을 벗고 샤워를 하는 동안 차근차근 복기된다. 이 때는 플래시백으로 크로스커팅된 화면들을 통해 찰리가 살인하는 과정의 전모가 묘사된다. 인디아는 그 과정을 지켜봤고, 죄책감에 괴로워 하는 줄 알았던 인디아는 샤워 중에 자위를 하며 머릿속 이미지를 복기하는 듯 쾌락에 부르르떤다.

요컨대 인디아는 삼촌 찰리를 통해 자신의 혈통이 갈구하는 자신의 정체와 취향을 깨닫는다. 뱀파이어가 멀쩡한 사람을 전염시켜 뱀파이어로 만들 듯이 찰리는 그들 가문의 나쁜 피를 인디아로 하여금 깨닫게 만든다. 그런데 선배 뱀파이어에게 감염된 뱀파이어에게 선배 뱀파이어의 존재가 필요없듯이 자신의 괴물성을 알게 된 인디아에게 삼촌이라는 조력자는 더이상 필요가 없다. 인디아는 엄마 이블린을 죽이려는 삼촌 찰리를 사냥총으로 쏴죽인다. 이때 그녀의 뇌리에 떠오르는 말은 나쁜 짓을 해야 더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는, 사냥을 나갔을 때 아빠가 해줬던 말이다. 삼촌을 죽이는 것과 새를 죽이는 것을 등치시키는 이 말, 살인을 사냥으로 등치시키는 이 말은, 영화 중반 이블린의 머리를 인디아가 빗겨줄 때 아름다운 이블린의 갈색 머리카락들에서 갈대숲 사냥장면으로 넘어가는 화면 전환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삼촌과 같은 괴물성을 지녔을지도 모를 인디아의 아빠는 미친 삼촌 찰리가 정신병원을 퇴원해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는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찰리에게 죽임을 당한다. 나쁜 짓을 해야 더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궤변의 귀착지는 인디아가 이블린을 보호하고 집을 나와 본격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또 다른 서막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결말에도 어울리는 것일까. 그녀, 인디아는 자신의 본성을 깨닫고 당당히 자신의 괴물성을 대자연 앞에서 선포하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이 악의 현현의 구체적인 이미지, 너무 매혹적이어서 저항하기 힘든 이 이미지의 함의는 정체를 가늠하기 어렵다.

더 나쁜 짓을 하지 않기 위해…

<스토커>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욕망의 인정 투쟁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찰리가 예고없이 자기들의 집에 들이닥쳤는데도 이블린은 그를 경계하기는커녕 환영하고 은근히 유혹하기조차 한다. 초반에 이블린과 인디아와 찰리가 저녁식사를 하는 식탁장면에서 세 사람 사이의 긴장은 눈에 띄게 한 남자를 둘러싼 두 여자의 경쟁 심리로 나타난다. 형수와 시동생, 삼촌과 조카는 남녀간의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인디아는 자신을 유혹하기 위해 엄마 이블린을 이용하는 삼촌 찰리의 수작을 지켜본다. 적당히 밀고 당기기를 하는 와중에 이블린이 함락당하는 것은 찰리가 엄마 이블린과 수작할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과 함께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면서부터이다. 인디아는 자신의 옆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자신의 등 뒤로 손을 돌려 연주하는 찰리의 동작과 음악 선율에 꼼짝없이 빠져들어 황홀감을 느낀다. <박쥐>에서 신부 상현(송강호)이 태주(김옥빈)의 피를 빠는 장면과 비견될 만한 이 명장면은 불가능한 욕망에 빠져는 과정 그 자체에 집중하는 박찬욱식 수사학의 극점으로 불릴 만하다. 이 장면에서 인디아가 저항할 수 없었던 것처럼 관객도 시청각적으로 엄습하는 그 관능적인 쾌락에 저항할 수 없게 된다. 소녀는 자신의 욕망을 구체적으로 느끼고 어른이 될 준비를 시작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 이전에 인디아가 찰리와 이블린이 희롱하는 걸 보다가 밖으로 나와 또래의 소년을 유혹해 숲으로 가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놀이터가 나오는 것은, 인디아의 욕망이 펼쳐져야 할 장소가 어디인지를 반어법으로 가리킨다. 어둠에 잠긴 놀이터에서 부분 조명으로 밝혀지는 빛들, 그 빛을 반사하듯 달뜬 욕망으로 날뛰는 소년은 소녀 인디아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당연히 그 사내아이는 사라져야 한다. 그 아이는 놀이터에서 놀아야 할 소년이고 소녀 인디아는 이제 어른 찰리의 인도를 받아 어른들의 세계에서 놀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박찬욱의 반도덕적인 상황 설정보다 금기를 뚫고 시연되는 욕망의 광경을 정교하게 보여주는 박찬욱의 수사학이 늘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 수사학을 통해 동요시키는 윤리적 진동은 가족이라는, 한국사회의 맥락에서는 거의 불가침의 영역에 가까운 무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충격을 준다. 금기와 욕망의 충돌이라는 테제를 가족의 영역 안에서 그가 밀어붙일 때 선악의 이분법 바깥으로 튕겨나가 광기를 광기 그 자체로 온전하게 보게 하는 힘이 그의 수사학에는 있기 때문이다. 박찬욱의 이전 영화와 <스토커>가 차이를 보이는 것은 자신의 비정상성을 온전한 정상의 테두리 내에 붙잡아 두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를테면 <박쥐>의 상현 신부와 같은 도덕적 자의식이 <스토커>의 인디아에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인디아는 <박쥐>에서 상현을 통해 피맛을 보게 된 태주가 광기와 욕망을 발산하다가 상현에게 제지를 받는 것과 달리 자신의 피를 선동한 찰리를 추종하는 듯하다가 그마저 제거해버리고 거리낌없이 대지로 나아간 것처럼 보인다. 태주와 달리 이제 인디아 앞에 방해자는 없다. 그녀에게는 오직 아버지가 남겨준 상대적 도덕의 유산만이 지침으로 남아 있다. 나쁜 짓을 해야 더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은 다른 한편으로 그녀가 앞으로 무궁무진 나쁜 짓을 할 수 있다는 걸 예상하게 만든다. 더 나쁜 짓을 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나쁜 짓을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렇게 굳게 결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적 취향은 전진한다

결국 바다 건너 할리우드로 간 박찬욱은 자신의 급진적인 윤리학을 우아한 형식미에 실어 단단하게 강화한다. 괴물은 괴물이되 판단하지 말라. 그 괴물성이 우리 인간성의 다른 측면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매혹적인 대상은 괴물이 되거나 자신이 괴물임을 자각하거나 자신이 괴물이라는 걸 감추지 않는 인간임을 박찬욱은 매혹적인 카메라 수사학으로 단정하게 보여준다. 인디아는 박찬욱의 이전 ‘복수 3부작’의 주인공들과 달리 처단당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포커페이스의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괴물성을 즐길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남들보다 많이 보고 잘 들을 수 있었던 비상한 능력의 소유자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아버지가 유언처럼 남긴 말을 따라 이제 나쁜 짓을 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당신들 이제 각오하라는 듯이 당당한 인디아 역의 미아 바시코프스카가 풍기는 할리우드영화에서도 이국적인 느낌의 미모는 인디아라는 이름의 어감이 주는 느낌과 더불어 우리와 섞이지 않는 무정부주의적 이방인의 권능을 느끼게 한다. 박찬욱의 할리우드영화에서 한국사람들이 나와 벌이는 이단의 쾌락을 받아들이는 충격이 덜해진 것은 유감이지만 그 자신의 미적 취향과 윤리적 급진성은 훨씬 진전했다고 느끼게 된다. 그의 다음 영화를 빨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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