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는 아마도 요즘 감독들 중 페티시즘을 가장 잘 활용하는 감독이면서 그 자신이 페티시즘의 대상이 되는 감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화양연화>에서 이런 형태의 숭배를 주제로 택한다. <화양연화>는 ‘시간’이라는 것의 마지막 순간을 드러낼 뿐 아니라 표현불가능한 어떤 주제를 둘러싸고 있는 꼬이고 꼬인 영화, 과감하면서도 놀라우리만치 섬세한 영화다.
여기서 “무드”(Mood)야말로 열쇠가 되는 주요단어다(<화양연화>의 영어제목은 ‘In the Mood for Love’다).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지성에 호소하는 바가 훨씬 큰 러브스토리로서, <화양연화>는 자신의 열정을 영화만들기에 대부분 사용한다. 뭔가를 더해가면서가 아니라 주로 뭔가를 빼내가는 감산을 통해서 말이다. 일종의 고착된 망상 속에서 애매한 사건들이 펼쳐진다.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과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거란 볼 수는 있으되 만질 수는 없는 것” 임을 메인캐릭터들은 끊임없이 설명한다. <화양연화>는 선별된 기억상실증이라는 원칙하에 세워진 작품인 것이다.
왕가위의 이야기는 주로 이주해온 상하이인들 사이에서, 60년대 초반 홍콩을 배경으로 일어나는데 이것은 감독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무대이기도 하다. 챈(장만옥)과 차우(양조위)는 같은 붐비는 건물 안에, 서로 붙어 있는 아파트 방을 동시에 빌린다. 그러고는 그 좁은 복도 안에서 끝없이 서로 마주친다. 병치되는 일련의 대화를 통해 그들은 그의 아내와 그녀의 남편(이들의 목소리는 여러 번 들을 수 있지만 얼굴은 절대 안 보인다)이 잦은 외국출장을 이용해 바람을 피우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 결과 챈과 차우는 종종 외로워지며 또 서로에게 끌린다.
이 과장된 대칭관계는 1928년의 무성영화 과 같은 도시 러브스토리를 왕가위식으로 바꾼 것이다. 외로운 젊은 연인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러다가 서로를 대도시 대중사회 속에서 잃어버리지만 알고보니 이름없는 여인숙 바로 옆방에 살고 있었더라는 식 말이다. 왕가위는 그런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그 이야기를 앞으로 끌고가고 뒤로 되돌리기도 하며 다루고 있다(때때로 챈과 차우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배신자 배우자들인 양 행동해보기도 한다. 마주칠 일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언젠가 맞닥뜨릴지 모르는 상황을 위해). 노골적으로 고안된 수도 없는 우연으로 빚어진 <화양연화>는 매우 실험적인 캐릭터 드라마임과 동시에 시간이라는 신화에 관한 의식이기도 하다.
두 스타들 사이에 오가는 불완전한 감정들로 나뉘는 짧은 신들이 매끄럽게 연속되는 <화양연화>는 드라마틱한 생략을 구사하는 한편, 특별한 순간들은 길게 지연시킴으로써 뛰어난 리듬을 만들어낸다. 왕가위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 내러티브를 끌어내고자 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이 이야기꾼은 화가가 화폭에 직접 모든 대상을 드리내지 않은 채 공간을 구성하듯 내러티브를 만들어가는데) 모더니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 우아하게 불행하고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그의 두 패배자들의 관계에 섹스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관객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 장면(Primal scene)이 없는, 가족로맨스다. 두 주인공의 몸은 단 한번도 서도 닿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 사이의 공기는 전기자기장 같은 강렬한 느낌을 자아낸다.
<화양연화>에는 다양한 시계들이 나오지만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관객은 오히려, 시간의 흐름을 주연여배우의 신마다 갈아입는 의상을 통해 깨닫는 법을 배우게 된다(그 많은 옷들을 보관하는 챈의 옷장은 얼마나 클까. 영화 외적인 미스터리다).
영화 속 교묘한 장치들은 모두 다 불길의 연료가 되어, 바람결에 흩어지는 시간의 재로 화한다. 그리고 남는 마지막 정조는 “그 시절은 지났다”는 것. “그 시절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왕가위이즘이란 것을 얘기할 수 있을까? 이 43살의 필름메이커는 가장 아방가르드적인 팝 필름메이커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가장 팝 필름메이커적인 아방가르드거나. 접근과 회피, 실재와 부재 사이에서, <화양연화>는 관객에게 아낌없이 주면서 동시에 몸을 사리며 물러난다. 옛날 할리우드프로덕션 코드만큼이나 엄격한 법칙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화양연화>는 랩소디처럼 승화한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숭고해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언젠가 누군가에겐 영원이었겠지만 이제는 텅빈 폐허가 된 앙코르와트를 카메라가 조용히 훑어갈 때, 불멸은 덧없음과 하나가 된다.(2001년 2월6일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