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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숭고하고 더러운 손이여

스티븐 스필버그, 프랭크 카프라 곁에서 존 포드를 응시하다

우리에게 각자의 이순신이 있듯이, 미국인들에겐 각자의 링컨이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비유는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미국인들에게 링컨은 미국 그 자체의 동의어에 가깝다. 그가 노예제를 영구적으로 폐지한 13조 수정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했다면, 혹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다면 미국은 지금 북부 중심의 합중국과 남부연합이라는 각각의 뿌리를 지닌 두 국가로 나뉘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링컨이 중대한 소명을 완성한 직후 피살당했다는 사실이 그의 국부(國父)적 지위에 순교자적 이미지를 더했을 것이다. 실존한 한 개인의 삶 자체가 건국신화가 된 드문 경우이며, 오늘의 세계에서 한 국가의 국민에게 그만한 압도적 무게를 지닌 인물은, 중국의 마오쩌둥을 제외한다면 거의 없을 것이다.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가득한 D.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4)에서조차, 링컨 피살 소식을 들은 남부인들이 그를 “우리의 유일한 북부 친구”라고 부른다.

2000년대 중반 스티븐 스필버그가 링컨에 관한 영화를 준비한다는 소식이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나는 약간 소름이 돋았고 호기심에 몸이 달았다. 늦게 잡아도 <A.I.>(2001)를 기점으로 그의 인물들은 쾌활한 모험가에서 과묵한 순례자의 모습으로 변해갔고, 화면에는 전에 없던 어둠과 악몽이 종종 깃들었으며, 시적 간결함과 유장한 페이스가 영화의 리듬을 장악해왔다. 그리고 <우주전쟁>(2005)이 우리의 말문을 막았다. 스필버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고전기도 아닌 21세기에, 할리우드의 심장부에서 위대한 영화예술이 태어나는 광경은 경이로운 미스터리였다.

우리가 스필버그의 링컨이 궁금했던 이유는 미국인과 다를 것이다. 그가 링컨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하느냐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며 새로움의 타당성을 판단할 지식도 우리에게 없다. 그 궁금증은 스필버그가 링컨을 다룬다면 어쩔 수 없이 미국영화의 근본적 의제에 이를 것이라는 짐작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서부극이 발견한 미국이라는 영화적 장소(스필버그는 종종 장소를 무대화함으로써 장소의 지역성과 물질성을 지웠다. 이이 점에서도 <우주전쟁>은 다소 예외적이다)의 기원, 그리고 개인과 소공동체와 스테이트(state)와 유니언(union)이 교차하는 미국인의 복합적 정체성의 근원과 만날 것이라는 예감, 결국 스필버그가 존 포드와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감 같은 것이었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링컨 역이 존 포드와 같은 아일랜드 출신 대니얼 데이 루이스(영국 태생이면서도 30대 중반에 아일랜드 시민권을 얻었다)한테 맡겨졌다는 사실도 그 예감을 든든하게 했다.

스필버그 최초의 현실정치 친화적 영화

마침내 우리 앞에 도착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은 감동적이지만 얼떨떨할 만큼 당혹스럽다. 스필버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링컨>은 링컨이 재선에 성공한 직후이며 남북전쟁이 4년째 계속되고 있던 1865년 초, 수정법안 13조를 통과시키는 과정에 집중한다. 이 영화는 거의 실내극으로 보일 만큼 백악관 관저와 의회 의사당이 무대의 다수를 차지한다. 종전 협상을 위해 남부연합 대표는 다가오고 있고, 노예제 폐지 법안은 의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법안 통과가 시급한가, 종전이 시급한가. 종전 협정을 맺고 나면 노예제 폐지 법안은 끝없이 연기될 것이며, 노예제 폐지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종전 협상을 미뤄야 하고 살육전은 계속될 것이다. 링컨은 야당뿐만 아니라 동지들도 반대하는 후자를 선택한다.

야당 의원을 매수(정확히 말하면 매직(賣職))하고, 남부연합 대표의 워싱턴 입성을 지체시키는 동안 전장은 더 많은 피로 물들어간다. 오직 링컨만이 그의 더러운 정치가 최선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그리고 표결과 전쟁 모두에서 승리한다. 놀랍게도 스필버그는 링컨의 이 더러운 정치에 이 영화의 모든 것을 건다.

<링컨>은 고결한 이상의 영혼이 아니라 그것에 봉사하는 추악한 손의 이야기다. 스필버그와 시나리오작가 토니 커시너의 걸출한 장인적 능력은 그 더러운 손이야말로 숭고하다고 결국 설득해낸다. 내가 아는 한 더러운 정치를 선한 소명의 도구로 이토록 찬미하는 미국영화는 이제껏 없었다. 예상을 뒤엎고 스필버그는 링컨을 주인공 삼아 생애 최초로 정치적 영화가 아닌 정치영화, 정확히 말하면 현실정치 친화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당혹스럽기는 미국 비평가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 견해를 늘 경청할 만한 비평가들인 켄트 존스와 조너선 로젠봄은 스필버그의 <링컨>을 두고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비평을 썼다. 켄트 존스는 “할리우드에 만들어진 가장 아름다운 역사영화 가운데 하나”라고 상찬했고(<필름 코멘트> 2013.1-2), 조너선 로젠봄은 “과도한 수사학과 빈곤한 역사의식의 졸작”(<포워드> 2012.11.16)이라고 혹평했다.

흥미로운 건 두 비평가의 태도가 현 미국 대통령 오바마에 대한 정치적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각 한때 이상주의자로 비쳤던 오바마의 현실주의적 선택에 대한 옹호와 실망을, 말하자면 현실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찬반 논평을 비평문에 고스란히 그리고 이례적으로 거칠게 드러내고 있다. 켄트 존스는 “그들이 뽑은 대통령이 그들이 생각했던 인물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즉시 오바마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들”을 겨냥해 “아프리칸-아메리칸 대통령의 탄생은 노예제 폐지론자가 제기하고 링컨이 출범시킨 기나긴 항해의 최종적인 그러나 아직도 위험한 국면에의 도착”임을 이 영화가 암시한다고 말했다. 조너선 로젠봄은 “오바마가 인종간 국가간 화합의 화신이 되리라는 믿음은 신화에 불과했다”고 단정하고, 이 영화가 “링컨이라는 렌즈로 오바마 시대를 바라보도록 유도한다”는 또 다른 평자의 비판(‘Easy Chair’, 토머스 프랭크, <HARPER’S> 2013.2)에 열렬히 동조했다.

이 논평들의 대립은 노무현 시대에 진보파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과 비슷한 양상이라는 점이 더욱 흥미롭다. 멀리 떨어진 우리는, 아마도 다행스럽게, 링컨에 대한 엄청난 전기적 사실들(그리고 소문들)과 미국 정치의 시급한 의제로부터 벗어나 스필버그의 <링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스필버그의 당혹스런 선택을 말하기 위해 이 영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떠올려지는 두편의 영화를 경유하려 한다.

<젊은 날의 링컨>과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

하나는 존 포드가 1939년에 만든 <젊은 날의 링컨>이다. 이 영화에는 이상한 장면 하나가 있다. 1837년, 젊고 양심적인 변호사로 스프링필드 주민의 호감을 얻고 있던 링컨은 독립기념일 축제의 하나인 주민 줄다리기에 참여한다. 밧줄 끝을 잡고 있던 링컨은 자기 팀이 패할 위기에 놓이자 밧줄을 마차에 묶어 승리로 이 끈다. 살인혐의를 뒤집어쓴 가난한 형제를 위한 링컨의 변호가 제재인 이 영화에서 왜 존 포드는 사건의 진행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 작은 에피소드를 슬쩍 집어넣었을까.

이 영화를 이야기로 정리한다면 이 사소한 장면이 거론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무심하게 지나칠 만한 장면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을 은밀한 오점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 오점은 중의적이다. 하나는 그 장면의 행위가 미국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익숙한 링컨의 도덕적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말 그대로 ‘더러운’ 반칙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며, 다른 하나는 그 장면이 서사에 통합되지 않는 하나의 얼룩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위인의 전기 장르에서 가장 미묘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인물의 결함이 다뤄지는 방식이다. 보편적인 기법은 결함과 실수를 부차적인 것으로, 미덕과 업적을 중심적인 것으로 다루거나, 그 결함들을 위대함에 내재된 속성으로 편입시키는 방식일 것이다. 존 포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젊은 날의 링컨>은 링컨이라는 인물에 대한 캐릭터 스터디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무심하게 드러나는 그의 서투름, 야심, 교활함과 용기, 정의감, 지혜로움은 하나의 캐릭터로 집약되지 않는다.

이 영화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다. 여기엔 운명적 멜랑콜리아라고 부를 만한 우울한 무드가 감싸고 있다. 그 무드는 링컨이라는 인물에 귀속된다기보다 영화 속 링컨이 종종 매혹되는 강물의 흐름처럼 혹은 무지한 그에게 법학책을 건네주고 죽은 어린 옛 연인의 묘비처럼, 이 영화의 장소와 속도, 사물들과 시선과 기억이 어울려 빚어내는 압도적 정조이며 <젊은 날의 링컨>이라는 영화적 소우주의 거스를 수 없는 공기와도 같은 것이다.

링컨이라는 인물에만 한정한다 해도 이 영화는 캐릭터와 사건과 행위의 영화가 아니라 음성과 동작의 영화에 가깝다. 링컨 역의 헨리 폰다는 고전기영화의 양식적 연기와는 완전히 다른 경지의 연기를 펼친다. 주변의 모든 소란을 잠재울 듯 고요하게 잠겨드는 그의 목소리, 망설이듯 느린 움직임과 걸음걸이, 갖가지 ‘이야기’로 주변 사람들을 늘 웃게 만들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듯 변함없이 우울한 표정… 우리가 만나는 것은 고난과 피투성이 싸움을 벌이는 초인의 강인함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순교자로 간택된 범인(凡人)의 불안과 외로움이다. <젊은 날의 링컨>이 그런 범인이 위인의 길을 걷는 영화라면, 존 포드가 7년 뒤에 만든 <도망자>(1946)는 반대로 그런 범인(이 영화에선 도피 중인 성직자이며 역시 헨리 폰다가 연기했다)이 변방에서 이름 없이 죽어가는 영화다.

존 포드가 고전적 서부극의 전범이라는 일컬어지는 <역마차>와 같은 해에 <젊은 날의 링컨>을 만들었다는 점이 우리를 난감하게 만든다. <젊은 날의 링컨>은 통상적 전기영화도 아닐뿐더러 고전영화의 규범을 거의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엔 잉여의 숏들, 사건화되지 않는 정지의 순간들과 시적인 대사들, 영적인 사물들의 표정으로 가득하다. 앞서 말한 은밀한 오점에 관한 진술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장면은 서사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예외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이 ‘더러운’ 행위가 공동선의 수행이라는 신(혹은 운명)의 명령에 대한 은밀한 저항 혹은 소극적 훼손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결국 <젊은 날의 링컨>은 범속한 성인(聖人)의 이야기다.

간단히 언급하고 싶은 또 다른 영화 한편은 <젊은 날의 링컨>과 같은 해에 만들어진 프랭크 카프라의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이다. 순박한 이상주의자인 보이스카우트 리더 제퍼슨 스미스(제 임스 스튜어트)가 갑자기 사망한 상원의원의 의원직 승계자로 뽑힌다. 시골뜨기인 신참 의원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패한 거물 정치인의 예상을 뒤엎고, 스미스는 23시간의 필리버스터(의사 진행 방해)와 멋진 연설로 워싱턴 정가를 뒤흔들고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존 카사베츠) 프랭크 카프라의 많은 영화들 중에서도 이 영화만큼 미국적 이상, 그 낙천적인 인민주의를 정교하고도 감동적으로 그려낸 영화는 없을 것이다. 할리우드가 창조한 가장 이상적인 미국 정치인이라 불러도 좋을 제퍼슨 스미스에게, 미국인들이 미국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실존 인물 링컨이 겹쳐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는 쾌활하고 명민하고 용감하며 소박한, 고결한 속인(俗人)의 이야기다.

고결한 속인과 범속한 성인 사이

내가 본 인터뷰 중에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영화들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 다만 그가 오래전에 “나는 존 포드가 아니라 P. T. 바넘(19세기 미국의 전설적인 쇼 비즈니스맨)에 가깝다고 느꼈고 그게 부끄럽지 않았다… 객석을 가득 채우는 것이 언제나 최고의 목표였다. 하지만 이젠 나 자신을 즐겁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1994)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나는 아직 나의 <멋진 인생>(프랭크 카프라의 1946년작)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만들고 싶다”(1978)라고 말했을 때, 포드와 카프라가 이 당대 최고의 흥행 감독에게 궁극적 모델이었음을 짐작할 수는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적어도 1990년대 말까지는 존 포드보다는 2차대전 이전의 프랭크 카프라에 가까웠다. 그의 인물들은 선의로 가득했고, 그 선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때때로 <태양의 제국>(1987)이나 <쉰들러 리스트>(1993)에서처럼 세상이 추악해도 자신은 그것에 속하지 않는다고 믿는 나르시시스트로 등장하기도 했다. 어느 경우에도 인물의 고결함은 훼손되지 않는 속성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A.I.>(혹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인물들에게 지울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졌을 때부터 스필버그는 그 너머 어디론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고결함은 포기되었고, 의지와 결단을 제압하는 운명적 기운이 그의 영화를 감쌌다.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나 <우주전쟁>, <뮌헨>(2005)과 같은 어둡고 무거운 정조의 작품들은 물론이고, <캐치 미 이프 유 캔>(2002)과 같은 가벼운 장르영화조차 예외는 아니어서 이 영화의 우아한 페이스와 적막한 무드는 매혹적이었다. 물론 <터미널>(2004)과 같은 그의 가장 카프라적인 영화를 만들기도 했고,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2011)과 같은 천진한 오락물에 손을 대기도 했지만 스필버그의 행로 자체가 바뀐 것 같지는 않다.

부당하게 저평가된 <워 호스>(2011)의 아름다움은 전쟁 비판의 고결한 수사와 장식적 풍경에 있는 게 아니라, 말(馬)의 귀가라는 한없이 단순하고 투명한 행위에 이 영화가 완전히 몰두한다는 점에 있다. 말은 돌아와야 했으므로 돌아왔다. 이 퉁명스런 동어반복을 벗어난 어떤 인과론, 어떤 수사도 즉시 쓸모없어지고 오직 돌아오는 행위, 그 단조롭고 힘겨운 동작의 긴 여정만 남겨진다. 이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존 포드의 서부극을 닮아 있다.

우리의 가설은 스필버그의 링컨이 스미스씨에서 젊은 링컨으로의 이행을, 다시 말하면 프랭크 카프라에서 존 포드에로의 이행을 보여주리라는 것이었다. 과도한 도식화가 허락된다면 이 이행은 고결한 속인에서 범속한 성인으로, 의지와 결단의 인간학에서 운명과 두려움의 신학으로, 또한 연방(Union)과 문명의 정치학에서 황야와 강의 지리학으로의 이행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링컨>은 그 중간 어디쯤에서 서성이며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에 한정할 때, 스필버그의 링컨은 여전히 스미스씨쪽에 더 가깝다. 그의 더러운 정치는 노예제 폐지라는 논박 불가능한 절대선에 봉사한다. 목적이 너무나 숭고한 것이어서 처음에 우리를 당혹스럽게 했던 이 더러움은 불가피한 것이 되고, 그 불가피의 고통을 감내하는 링컨의 고결함은 훼손되기는커녕 더욱 고양된다. 카프라의 스미스씨는 정직성과 용기만으로 워싱턴 정가를 흔들었지만, 스필버그의 링컨은 거기에 탁월한 정치 기술까지 겸비해 국가를 정화시킨다. 허구와 실화의 차이를 무시한다면, 스필버그의 링컨은 스미스씨의 업그레이드된 리얼리즘 버전이다. <젊은 날의 링컨>은 그 반대편에 있다. 존 포드의 링컨이 보여준 오점은 고결한 소명에 대한 은밀하지만 필사적인 저항이며 그의 범속성의 표지다.

물론 스필버그의 링컨은 스미스씨와는 달리 우울하고 종종 악 몽에 시달린다. 그 우울은 아들 윌리의 죽음, 아내의 정신병 징후라는 원인의 결과로 명시된다. 게다가 그는 전쟁과 수정법안이라는 고통스러운 국가적 윤리적 난제까지 떠안고 있다. 스미스씨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 링컨은 아내와 격렬한 언쟁을 벌이며 “(윌리를 묻을 때) 나도 관과 함께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었어. 지금도 매일 그래”라며 무서운 표정으로 소리친다. 링컨의 캐릭터가 의외로 단조로운 것은 그의 고결함과 유능함은 천부적인 것으로 고정되어 있고, 내면의 어둠조차 명백한 사건의 결과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씨와의 가까운 거리에도 불구하고 스필버그의 링컨은 포드의 젊은 링컨을 종종 쳐다본다는 느낌을 준다. 초반부에 링컨은 아내에게 지난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고 우리는 이 영화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뛰어난 꿈장면을 만나게 된다. 묵화가 번지는 듯한 터치의 어둡고 흐린 화면에 링컨을 실은 작은 배가 아찔한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링컨이 “내가 어디로 그렇게 급하게 가고 있었을까”라고 묻자 아내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건 (임박한 웰밍턴항 폭격이 아니라) 수정법안이야”라고 대답한다. 링컨이 중얼거린다. “이상한 건 그 속도야. 내가 익숙한 건 느린 속도거든.”

이 속도라는 말이 이상하게 깊은 울림을 준다. 물론 이것조차 서사 내에서 충분히 설명된다. 반대파 의원들은 수정법안을 두고 “매사 질질 끌던 그 게으름뱅이가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라고 빈정거린다. 이상한 점은 이것이다. 그가 서둘러야 하는 이유는 링컨 스스로 넘칠 만큼 충분히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 꿈 에피소드는 완전히 불필요한 잉여다. 사건의 연쇄에서 벗어나 있는 잉여이며 그것이 꿈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 대목을 스필버그가 잠시 멈춰 서서 이 영화를 만드는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해석하고픈 유혹에 이끌린다.

링컨 혹은 스필버그가 궁금해한 건 속도다. 우리는 스필버그의 21세기 영화가 갑자기 느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느려지면서 사건은 뒤로 물러나고 그의 영화에는 사건이 담지 못한 풍부한 표정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스필버그는 이렇게 자문하는 것 같다. 나는 왜 갑자기 이렇게 빠른 사건들의 이미지로 다시 돌아와 있는 걸까. 혹은, 나는 왜 <젊은 날의 링컨>의 속도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스필버그 호의 항로

물론 이건 과잉해석일 것이다. 꿈 에피소드가 결국 만나는 것은 이 영화의 마지막 대목들이다. 13조 수정법안이 통과되고 종전 협정이 이뤄진 지 며칠 뒤, 링컨은 백악관을 나서고 카메라는 그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다. 기다란 팔다리를 힘겹게 움직이며 느리게 걸어가던 사내는 계단 아래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유리창 뒤엔 묘지의 형상과도 같은 어두운 정원이 비친다. 우리는 그가 얼마 뒤 피살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피살장면은 생략되어 있다). 그는 지금 죽음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꿈 에피소드에서 그가 한 질문, “내가 어디로 그렇게 급하게 가고 있었을까”에 대한 대답은 이 장면이다. 그는 행선지도 배의 속도도 알지 못했지만, 결국 죽음이라는 목적지로 이송된다.

스필버그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장면을 <젊은 날의 링컨>에 대한 오마주로 보지 않기란 힘들다. 포드의 젊은 링컨은 법정에서 완벽하게 승리한 뒤, 언덕을 오른다. 먹구름이 몰려들고 비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여전히 어두운 표정의 사내는 언덕에 서서 무언가를 바라본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영화 내적 시간으로는 28년 뒤에 죽을 것이지만, 이 신비롭고도 암울한 라스트 신에서 링컨은 이미 자기의 속도와 의지를 벗어난 죽음행 배에 올라타 있다. 스필버그도 자신의 링컨을 그 배에 태운다.

<링컨>에서 스필버그는 아직 카프라의 세계와 가까운 곳에 서서 포드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 같다. 그도 아마 자신을 실은 배의 속도를 알지 못할 것이다. <링컨>은 이젠 할리우드에서도 소수가 되어버린 유능한 스토리텔러의 장인적 능력이 집약된, 모든 요소들이 완벽하게 조율된 뛰어난 서사의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가 우리를 오랫동안 생각하게 만든다면 포드적 세계를 향한 스필버그의 거둬지지 않는 시선, 삶과 이미지의 속도에 대한 여전한 자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는 종종 우회하고 샛길을 두리번거리지만 조금씩 더 나아갈 것이다. <링컨>은 걸작이 아니지만, 스필버그의 영화를 계속 기다려도 좋다고 말해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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