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은 종종 자살을 택한다. 동급생에게 왕따를 당했던 한 소년 역시 자신이 장난감이나 제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을 택한다. 그리고 그 소년, 후지슌이 남긴 유서가 뒤늦게 발견된다. 유서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4명. 2명은 소년을 괴롭힌 가해자고 나머지 한명은 소년이 짝사랑한 대상 사유리 그외 한명은 소년이 절친이라 칭하는 동급생 사나다 유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실제로는 별로 친하지 않으나 후지슌이 사나다를 절친이라며 유서에 언급한 것이다. 시가마쓰 기요시의 소설 <십자가>는 후지슌이 왜 사나다를 절친이라 말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속 시원히 대답해줄 후지슌은 이미 세상에 없다. 사나다는 후지슌이 유서에 언급한 ‘절친’이란 단어를 마치 십자가처럼 짊어진 채 살아가게 된다. 친구의 죽음을 그저 바라보기만 한 방관자라는 꼬리표 때문이다. 이처럼 한 소년의 죽음은 주변인의 삶에도 그늘을 드리운다. 사나다뿐만 아니라 후지슌의 가족, 사유리, 가해자 2명 그리고 유서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가해자들과 함께 후지슌을 괴롭힌 사카이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삶에는 죄책감이라는 그림자가 뒤따라다닌다.
작품은 왕따 피해자가 후지슌을 비롯한 그 주변인들 전부라고 말한다. 어쩌면 후지슌을 괴롭힌 가해자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십자가>가 후지슌의 주변인의 그늘진 삶과 고통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나다가 자신의 아들을 통해 후지슌이 말한 ‘절친’의 의미를 우연히 깨달아가는 과정이 그렇다. 왕따와 자살이 더이상 대수롭지 않은 비정한 세계 속에서 사나다가 발견한 절친의 의미는 가슴을 묵직하게 만든다. 그것이 후지슌의 인생을 되돌릴 수 없는 이미 때가 늦은 깨달음일지라도 말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무디거나 너무나 익숙할 수 있는 이 소설의 메시지가 의미있게 다가오는 까닭도 이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