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환. 그는 재일조선인이다.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선임연구원인 그는 2009년 서울에서 개최된 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사카총영사관에 여행증명서 발급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경향신문> 2012년 12월10일치 사설 ‘무국적 동포 인권 누가 보호해줘야 하나’) “경찰청에서 신원증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씨는 조선적(朝鮮籍)을 지닌 재일조선인이다. 그의 국적은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일본도 아닌 ‘조선’이다. “조선적들은 무국적자”이며 “친북성향도 의심되기 때문에 외국인보다도 엄격하게 입국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온 한국 정부를 상대로 그는 현재 법적 소송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1심에서 승소했지만, 2심에서 패했고, 현재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정씨의 사연을 뒤늦게 접한 뒤 관련 기사를 검색하다 2008년 이후 한국 정부가 조선적 재일조선인들의 여행증명서 발급 요청을 묵살해왔음을 알게 됐다. 그전엔 많아야 한해 4, 5건에 불과했던 여행증명서 거부 건수가 2009년 한해에만 무려 279건에 달했다고 한다. 지난 5년 동안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대화 자체가 중단된 상황에서 조선적 재일조선인들의 여행증명서 거부 건수가 늘었으면 늘었지 줄었을 리 없다. 북한의 핵실험을 전후로 남북이 강경하게 대치하고 있는 정세를 감안하면, 조선적 재일조선인들의 한국 방문은 앞으로 더더욱 요원한 바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재외동포라 불리지만, 무국적자로 분류되고, 이제는 불순분자라는 낙인까지 찍혔다.
한국 정부가 요구하는 대로 조선적 재일조선인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 그렇게 반문하기 전에 재일조선인들의 신산한 역사를 살펴야 한다. 그들은 어떻게 ‘조선적’이 됐고, 왜 지금까지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조선적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인가(이와 관련해선 재일조선인인 서경식 교수의 책들을 추천한다). 3월7일 개봉하는 양영희 감독의 <가족의 나라>는 지난 50년 동안 우리의 무지몽매가 어떤 참극을 빚어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물론 <가족의 나라>는 대놓고 (우리의) 책임을 추궁하진 않는다. 하지만 양영희 감독이 한국의 관객으로부터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구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것은 분명 아니다. (영화평론가 김효선이 지적한) <가족의 나라>의 침묵과 머뭇거림 앞에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그렇게 몇번이고 우리가 자문하지 않는다면,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불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