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2년 사이 한국 바이어들이 유럽 마켓에서 애니메이션을 무차별적으로 구입해온 탓에 올해는 작품 가격이 크게 뛰었다.
한편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편만 본 사람은 없다. 올해 극장가를 찾는 애니메이션 관객의 말이다. 올해 31살인 주부 A씨는 이번 1월에만 벌써 4번째 극장을 찾는다. 겨울방학을 보내는 아이들과 함께 갈 만한 곳으로 극장만 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은 매주 새로운 애니메이션이 극장에 걸려 볼 것도 많다. 지난주에는 아이들이 졸라서 <명탐정 코난>을 보러갔고 이번주엔 SBS 예능프로그램 <일요일이 좋다-런닝맨>의 이광수가 목소리 연기를 했다는 <해양경찰 마르코>를 보러 갈 예정이다. 얼마 전부터는 엄마들끼리 좋은 작품을 추천한다는 커뮤니티에도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작품을 골라 본다. 학기가 시작되고 개봉하는 작품들도 있지만 주5일제 수업으로 주말 관람도 그리 어렵지 않다. 한편 평소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직장인 B씨는 얼마 전 개봉한 <부도리의 꿈>을 보러 극장을 찾았다가 낭패를 봤다. 거장 스기이 기사부로 감독의 신작이라는 소문에 오랜만에 극장을 찾았지만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는데도 영화표를 끊을 수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직원에게 물어보니 오전에 2번 상영을 끝으로 오늘은 더이상 상영하지 않는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다른 거라도 보자 싶어 표를 끊으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극장가에 불어닥친 애니메이션 열풍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가히 애니메이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2013년 2월까지만 해도 벌써 20편 정도가 상영했다. 지난해 12월 말부터 계산하면 총 26편이니 대략 한주에 2편꼴로 개봉한 셈이다. 2009년 29편, 2010년 28편의 애니메이션이 극장 개봉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최근 극장가에 불고 있는 애니메이션 열풍이 어느 정도 크기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극장애니메이션의 편수는 2011년을 기점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났으며(2011년 41편, 2012년 44편.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2013년에는 이를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올해 2월까지만 해도 이미 예년 개봉작의 절반을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의 비수기인 3월 이후에도 <글래디에이터: 로마 영웅 탄생의 비밀 3D> <돌핀: 꿈꾸는 다니엘의 용감한 모험> <원피스 극장판 제트> <후세: 말하지 못한 내 사랑> 등이 줄줄이 대기 중이기 때문이다.
스타 마케팅과 ‘전체 관람가’가 지배하는 흥행지도
물론 2012년 하반기부터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 작품의 급격한 증가 추세는 겨울방학 시즌에 개봉하려는 애니메이션 시장의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수기인 3월까지 개봉 일정이 잡혀 있다는 사실은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 환경에 비춰볼 때 이례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비단 개봉 편수만 증가한 것이 아니다. 2009년 기준 약 1천만명을 기록했던 애니메이션 총관객수 역시 2012년 기준 1600만명을 넘어서며 50% 이상의 뚜렷한 증가세를 보였다(한국콘텐츠진흥원 기준). 하지만 이를 두고 단순히 호황 내지는 시장의 확대라 낙관하기엔 여러가지 마음에 걸리는 지점들이 있다. 양적으로는 증가세가 분명하지만 막상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안정적인 시장의 성장이라 말하기엔 우려되는 지점들이 다수 발견되기 때문이다.
2012년 이후 극장애니메이션은 몇 가지 뚜렷한 경향을 보인다. 우선 지난해부터 꾸준히 증가한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대다수가 해외 애니메이션들이라는 점, 두 번째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작품들이 대다수라는 점, 세 번째는 연예인 더빙을 통한 스타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저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아동용 애니메이션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2년 12월부터 2013년 2월까지 석달간의 추이를 분석해보면 총 26편 중 15세 관람가가 1편, 12세 관람가가 1편 있으며 나머지는 모두 전체 관람가다. 애니메이션이 가족용, 전체 관람가가 많은 것이야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최근 석달간 개봉한 작품들만 놓고 보자면 그중에서도 저학년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개 애니메이션을 영화의 하위 장르 중 하나로 넓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애니메이션 역시 장르, 관객층, 성향 등 세분화된 구분이 요구된다. 최근 10년 사이의 국내 극장애니메이션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마당을 나온 암탉>과 같은 순수 국내 창작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처럼 TV시리즈를 기반으로 하는 극장판, 디즈니/드림웍스/픽사/지브리 등 거대 스튜디오가 제작한 대작, 그리고 10만~20만달러의 가격으로 수입되는 기타 해외 애니메이션들이 그것이다. 그중 2012년 이후 뚜렷이 증가세를 보인 분야는 작은 규모의 해외 애니메이션, 그리고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교집합에 있는 작품들이다. 반대로 이야기해보면 해외에서 수입된 소규모의 아동용 애니메이션들을 제외하고는 시장의 양적 변화가 전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1년 <마당을 나온 암탉> 이후 국내 창작애니메이션의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작품이 없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2012년에 개봉한 국내 창작장편애니메이션은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3D>(이하 <점박이>)와 <볼츠와 블립> <파닥파닥> 등 3편에 불과하다. <점박이>가 105만 관객을 동원하며 의미있는 행보를 이어나갔지만 도리어 이것이야말로 현재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의 관객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로 읽을 수 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점박이>의 흥행을 이끈 동력은 다름 아닌 교육용 애니메이션에 대한 갈증이었다. TV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육과 오락성을 동시에 공략하는 애니메이션이 적었던 극장애니메이션의 틈새를 효과적으로 공략한 것이다. 유아용 애니메이션 <냉장고 나라 코코몽>을 만든 올리브 스튜디오와 드림써치C&C, 그리고 EBS가 합작해서 만든 <점박이>는 제작 주체를 살펴보면 작품의 정체성이 명확하게 확인된다. 요컨대 아동, 3D, 그리고 교육용 콘텐츠다.
교육용 콘텐츠로 잘 다듬어진 유럽 애니 수입 늘어
아동애니메이션 시장은 디즈니 등의 대형 스튜디오 작품이나 TV시리즈를 확보하고 있는 브랜드 캐릭터의 극장판과는 다른 독립된 시장으로 파악된다. 전체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볼 때 관객수와 개봉 편수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 두 영역의 수치가 그다지 변화가 없음이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아동애니메이션 시장이 최근 1~2년 새 급격하게 형성된 원인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관객의 관람 패턴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영화예매 사이트 맥스무비에 따르면 2012년에 40대 관객이 25.8%로 20대 관객(20.1%)을 앞선 것으로 조사됐는데 이에 대해 맥스무비 김형효 실장은 “40대 관객은 자녀들과 함께하는 가족 단위의 관람 형태를 보이는 만큼 40대 관객의 증가는 지난해 가족애니메이션의 성적이 좋은 직접적인 이유”라고 분석했다. 또한 수입/배급사 스마일 이엔티의 송효정 과정은 “2012년부터 초등학교 주5일제 수업이 본격화하면서 가족단위 관객을 위한 애니메이션 시장이 활성화된 것”이란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항은 유럽 등지의 중/저예산 애니메이션이 대거 수입되었다는 점이다. 2011년 <토르: 마법망치의 전설>은 76만 관객이라는 의외의 성과를 기록하며 유럽 애니메이션의 흥행 신호탄을 알렸는데 이후 상당수 수입/배급사들이 적극적으로 이들 애니메이션을 선점하며 콘텐츠 확보에 열을 올렸다. 규모가 작은 수입/배급사 입장에서 애니메이션 장르의 매력은 목표 관객층이 명확하다는 것에 있다. 아동 관객의 성향과 선호는 예측을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타 장르에 비해 리스크와 변동이 적은 시장이란 것이다. 콘텐츠만 좋으면 오래된 작품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시장에서 받아들여진다는 점은 아동 애니메이션 시장의 큰 장점 중 하나다. 유럽 애니메이션이 교육 콘텐츠로 잘 다듬어져 있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공급이 풍부한 반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유럽 애니메이션을 가져와 흥행을 하면 몇 편이 손해가 나도 수익을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입/배급업계의 이해관계와 본격적인 시장 형성이 결합하며 폭발적인 작품 수의 증가를 불러온 것이 최근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확대의 주요한 골격으로 파악된다. 이는 고스란 히 다른 극장애니메이션으로도 이어지는데 전통적인 강자였던 일본 애니메이션 역시 호의적인 시장 분위기에 힘입어 최근 연이어 TV시리즈 극장판을 개봉하고 있다. <밀림의 왕자 레오2>(1997)나 <메모리즈>(1995)처럼 시간이 꽤 지난 작품들까지 디지털 리마스터링이라는 이름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 또한 특이할 만하다.
하지만 이같은 폭발적인 개봉 편수의 증가를 반드시 시장의 증대 혹은 관객층의 확대로 보기는 힘들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최근 개봉한 애니메이션들은 디즈니 등의 대형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철저히 아동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대형 애니메이션들의 경쟁상대가 일반 극영화들이라면 이들의 경쟁상대는 극장을 찾는 좁고 충성도 높은 아동과 부모들이다. 2011년부터 이어진 관객수를 기준으로 추산해보면 현재 이 같은 관객은 최대 100만명 내외로 예상되며 이 한정된 수의 관객이 여러 영화를 동시에 관람하는 패턴을 보인다. 즉 평균 20만~30만명의 관객이 국내 개봉 중인 극장애니메이션을 거의 다 챙겨보고 있는 셈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아동애니메이션들은 아동과 학부모 이외의 다른 관객들에게는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현재 애니메이션 편수의 증가를 단순히 시장의 확대로 연결지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애초에 좁고 충성도 높은 시장임을 감안할 때 이같은 반복 관람과 시장의 폐쇄성이 불러올 결과는 자명하다. 이미 곳곳에서 시장의 과열에 따른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는데, 수입/배급사 에이원 엔터테인먼트의 민철환 대표는 “아동애니메이션을 점점 많이 찾다보니 유럽 마켓에서도 구입 조건이 까다로워지고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고 사정을 밝혔다. 얼리버드 픽쳐스의 김대창 이사 역시 “유럽 마켓을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올해 베를린을 다녀온 지인의 말로는 상상 이상으로 오른 가격에 놀랐다고 들었다”며 결국 이는 전체적인 비용 상승을 불러올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극장에서는 수익이 나지 않아도 IPTV 등 부가판권시장에서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악용한 기형적인 수입 형태도 나타나고 있다. 김대창 이사는 일부 업체의 경우 부가판권업체에서 선수금을 받아 다른 작품을 구매한 뒤 수익이 나면 이를 메워주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고 밝혔다.
한국 애니메이션 저변 확대 가능할까
애니메이션에 대한 피로감도 만만치 않다. 처음부터 큰 규모의 작품을 만들기 어려운 국내 창작애니메이션 환경상 자연스레 경쟁상대는 유럽 애니메이션과 유사한 규모의 작품들이 될 수밖에 없는데 어렵게 작품을 내놓아도 수많은 유사 경쟁작 중 하나로 묻혀버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유럽 애니메이션을 가져올 경우 인상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연예인 더빙을 통한 스타 마케팅을 하는 사례가 빈번한데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를 국내 애니메이션의 연장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게다가 해외 아동애니메이션이 대량으로 유입되며 스크린이란 한정된 자원을 이미 선점해버린 탓에 국내 창작애니메이션이나 다른 장르의 애니메이션이 극장을 확보하기 힘들어지는 등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 걱정해야 할 지점은 애니메이션은 아동용이라는 고정관념의 확산에 있다. 극장 입장에서는 오전 시간대를 편하게 메울 수 있는 아동애니메이션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결과적으로 한정(고정)된 관객층을 공략하는 아동애니메이션 이외의 작품들이 설 자리를 찾기 힘들어질 우려가 있으며 이는 애니메이션 시장과 다양성의 축소로 이어질 수도 있다. 다행히도 이같은 문제가 아직 본격화하지는 않은 상태이며 이미 수입되어 배급을 기다리고 있는 작품이 상당수 있기 때문에 당분간 이같은 현상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건 변화는 이미 일어났다. 여러 가지 불안요소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에 대해 우호적인 시장이 형성된 것 역시 분명하다. 이것을 기회로 활용하여 한국 애니메이션 산업의 저변을 확대할 수 있을지 아니면 거품이 꺼진 뒤 타격을 고스란히 받게 될지는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