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에서 재밌는 멘션을 하나 봤다. 최근 흥행한 영화 중 대표적인 게 <레미제라블> <7번방의 선물> <남쪽으로 튀어>인데, 이 영화들이 흥행한 이유가 대선에서 패배를 맛본 48%가 영화관만 찾아서 돌아다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한 내용이지만 문득,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해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영화의 내용을 보면 (<7번방의 선물>은 보지 못했기에 나머지 두 영화만 놓고 보면) 현실의 벽 앞에서 처절하게 부서지고 깨지는 내용이다. 물론 그 안에는 처절한 몸부림도 있고, 미래에 대한 약간의 희망도 있지만 어쨌거나 결말은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위로’가 된다면, 바로 영화 속 현실이 개박살이 났기 때문이라고밖엔 해석이 안된다. 어려운 현실을 초인적으로 극복해내는 내용을 봐도 시원찮을 판에 영화 속 개박살을 보며 “와, 나랑 똑같아! 너무 공감돼!” 하며 위로를 받는다? 가히 무시무시한 공감쟁이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이 ‘공감쟁이’들은 대선 때도 ‘공감’과 ‘소통’이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문재인 후보에게 ‘존경해요!’라거나 ‘위대해요!’라는 말을 하기보다는 옆집 아저씨 대하듯 ‘달님’이란 친근한 별칭을 붙이는가 하면, 거리 유세에 나선 안철수 후보가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고 ‘소리통’을 쓰는 것을 두고 “아니, 도대체 보좌관이 누구기에 후보 마이크도 안 챙겨!”라고 화내기보다는 시민들과 같은 높이에서 소통한다면서 깔깔거리며 좋아하기도 했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비록 전부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결단력’이라든가 ‘당 장악력’이라든가 혹은 ‘원칙과 소신’ 같은 말들로 박 후보를 자랑했다. 이러한 것들은 평범한 이들이 갖추기 어려운 것들이고 당연히 ‘공감’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 범인들은 결코 갖추지 못한, 그래서 범인들보다 뛰어나고 위대하며 범접하기 힘든 ‘권위’를 상징한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권위쟁이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공감쟁이와 권위쟁이의 투닥거림이 사실 대선 때가 처음은 아니다. 한창 뜨거웠던 무상급식 이슈가 온 언론을 도배할 때, 공감쟁이들은 밥 굶는 아이들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며 반드시 무상급식을 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권위쟁이들은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공짜로 얻는 것은 버릇을 나쁘게 만들고 역차별을 유발한다며 결사반대했다. 전자가 공감에 기초한 찬성이라면, 후자는 노력과 보상이란 기성 훈육체계의 권위를 흔드는 것에 대한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두 가지 유형의 대립은 단지 어떤 세력이나 진영의 대립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사고체계’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구분은 세력과 세력, 사람과 사람으로 나뉘는 것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도 나뉘어져 다툰다. 때론 공감쟁이가 되기도 하고, 때론 권위쟁이가 되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셈이다.
그렇다며 과연 어느 쪽 사고체계가 더 옳을까? 어느 쪽 사고체계를 주로 사용해야 할까? 여기에 대한 답은, 당연히 각각의 개인이 내려야 한다. 사고란 걸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뇌의 주인은 당연한 말이지만 오직 자기 자신뿐이니까.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어느 쪽이든 자신의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이다. 공감과 감정이입에 근거한 사고체계를 사용한다면서 부와 명성, 권력에 주로 감정이입하거나, 권위에 근거한 사고체계를 한다면서 정작 조롱받는 권위에 복종을 강요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부디 진보와 보수 모두,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