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해원(정은채)이 쓴 세편의 일기가 놓여 있다. 그 속에는 모두 영화과 교수 성준(이선균)이 등장하는데, 그중 3월21일에 쓴 첫 번째 일기는 엄마(김자옥)로부터 시작된다. 해원의 엄마는 내일 캐나다로 이민을 떠날 예정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지금과는 다른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이라는데, 그런 엄마를 보낸 뒤 해원은 기분이 울적해져서 과거의 연인인 성준에게 연락한다. 함께 서촌을 걷던 두 사람은 저녁 무렵 학생들과 우연히 마주치는데, 급하게 꾸민 알리바이 탓에 둘의 관계는 더 의심받는다. 이에 술 취한 해원이 친구들에게 큰소리로 둘러댄다. “내일 엄마가 캐나다로 떠나는데 외로운 마음에 선생님을 불렀다. 이것이 오늘 일어난 일의 전부다”라고.
3월27일의 두 번째 일기는 남한산성이 배경이다. 이날 성준은 해원에게 자신이 죽은 뒤 세 가지를 남기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자식, 영화 그리고 기억’이다. 그의 이야기처럼 신기하게도 그를 한번 본 식당 주인이나 등산객 등의 인물들은 모두 그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이날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말다툼을 하게 된다. 해원이 대학 동기 재홍과 사귀었다는 사실을 성준이 뒤늦게 알아차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산꼭대기에 걸터앉아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죽으면 모든 게 끝이야”라고 서로를 위로해준다.
4월3일의 마지막 일기에서 해원은 도서관에 앉아 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친구 유람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그에게 자신과 성준과의 관계를 모두 털어놓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는 전부 꿈이다. 이후 해원은 연주(예지원)에게 연락해서 그녀의 남자친구(유준상)와 셋이서 남한산성을 오르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다시 성준과 연락이 닿아 그를 또 만난다. 하지만 이 장면들 역시 이후에 꿈으로 드러난다. 때문에 그녀가 읊은 마지막 내레이션 “꿈에 보인 아저씨는 정말 착한 아저씨이다”라는 말 속의 ‘아저씨’가 정확히 누구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술을 권한 등산객인지, 그녀를 사랑한 성준인지, 그것도 아니면 결혼상대로 적합한 미국 교수인지 정답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홍상수 영화에서 디제시스(diegese)를 설명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사건이 존재한다기보다 영화 속엔 결국 인물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의 열네 번째 장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역시 이 경향이 짙다. 서사물 스스로가 이야기되는 느낌의 스토리(histoire)로서가 아니라, 발신자와 수신자의 흔적을 담은 담화(discours)에 영화가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건들의 전후관계에 연관해 영화를 살피기보다, 비슷한 개념들을 포획하면서 구조적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이를테면 엄마가 외국에서 하려고 한 행동을 해원이 공원에서 직접 하는 것을 살피거나, 유부남과 사귀기에 ‘미쳤다’고 표현한 연주의 행동을 고스란히 그녀가 뒤쫓는 것을 유심히 보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영화의 타이틀 ‘누군가의 딸도 아닌 해원’의 의미와도 연관된다. 해원이 결국 누군가의 딸이 아닌 ‘진짜 해원’이 되지 못하리란 걸 관객은 마지막에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진실을 끝까지 숨기는 영화, 그래서 진실을 알기 위해선 깃발의 방향을 따라 추측해야 하는 영화, 인물들이 사건이 아니라 서로의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진실을 모방하고 비난해서 결국 정말의 진실을 저 너머로 사라지게 만드는 영화가 바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다. 외화면(hors-champ)의 개념을 지워나가는 감독 특유의 카메라워킹 또한 이번 작품에서 예외없이 발견된다. 때문에 갖가지 트래블링 숏들이 난무하고, 광학 트래블링으로서 줌이 사용된다. 얼마 전 열린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공식 초청되었으며, 프랑스 여배우 제인 버킨이 자진 출연한 첫 장면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