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하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서 미쳐버릴 지경이다. 뼈마디가 휘어지도록 누군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한다면 후련해질까? 책상 위에는 말라비틀어진 햇반과 컵라면과 커피잔과 텀블러들이 나뒹군다. 노트북을 열고 시나리오를 펴놓은 지 10시간이 넘어가도록 커서의 위치는 여전히 제자리다. 아니 저 자리라면 벌써 일주일은 된 것 아닌가? 젖먹던 힘까지 다 끄집어내고, 전 존재를 기울여 타이핑을 해본다. 신부는 형사를 부축해 일어선다. 신부는 형사를 부축해 일어선다. 신부는 형사를 부축해 일어선다. 똑같은 문장을 수십번씩 친다. <샤이닝>의 잭 니콜슨도 아니고… 이러고 앉아 있다.
화면 위의 글자들이 명왕성에서 온 외계어처럼 보인다. 글자들이 난수표처럼 노트북 화면 아래로 뚝뚝 떨어져내린다. 머리를 쥐어뜯고 화장실로 가 찬물을 뒤집어쓴다. 거울에 비친 무능하고 덥수룩한 한 마리의 루저를 온갖 혐오와 비난을 담아 쏘아본다. 넌 이 세상에서 가장 못생기고 형편없는 말라비틀어진 당나귀야. 한대, 두대, 뺨을 때리기 시작한다. 눈이 벌게지도록 수십대를 갈긴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옥상으로 나가 담배를 질겅질겅 씹는다. 해는 기운 지 오래.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이다. 젠장! 또 하루가 갔구먼. 별수 있나, 내일부터라도 정신차리고 한 글자 한 글자 써나가는 수밖에. 난 이대로 영락할 것이다. 대한민국 영화사에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한 채 헛되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 갈수록 힘들어진다. 한줄은커녕 단 한 음절도 쓰지 못하고 집에 돌아가는 일이 부쩍 늘었다. 담배는 늘고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간다.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게 누군들 내 몸속 장기 하나쯤은 서슴없이 떼내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러브픽션>을 만들기도 전에 시작했던 <미로>라는 제목의 시나리오지만 4년이 흐르도록 끝이 보이질 않는다. 제작자는 이제 거의 포기했는지 재촉도 않는다. 심기일전을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명상도 해보고 요가도 해보고 컴퓨터를 바꾸고 머리를 기르고 머리를 자르고 머리를 염색했다. 영화의 운명은 제목 따라 간다더니 제목처럼 미로 속에서 헤어나올 줄 모른다. 그렇담 제목을 <출구>로 바꿔볼까?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그러셨다. 얘야, 네가 커서 무슨 일을 하든 너만 좋다면 상관없단다. 다만 글쓰는 일만큼은 하지 말거라. 예, 어머니 저도 제 인생이 이 지경이 될지 몰랐어요. 이럴 줄 알았다면 영화 일 따위 진작에 시작도 안 했을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