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잖이 피로한 눈빛이다. 하지만 꼿꼿하게 세운 등이 새삼 당당하다. ‘전규환’이란 이름 세 글자가 국내 관객에게 다소 생소할지도 모르지만 해외 영화계에서 그는 이미 유명인사다. <애니멀 타운> <모차르트 타운> <댄스 타운>의 ‘타운’ 3부작, <불륜의 시대>(원제 <바라나시>), 그리고 6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퀴어사자상을 수상한 <무게>까지 크고 작은 영화제에 여러 차례 수상을 했다. 그러나 유독 한국에서만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저예산 독립영화에 대한 우리 영화계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영화가 대중과 만나기까지 넘어야 할 장벽은 한두개가 아니다. 2011년 부산영화제에서 먼저 소개된 <불륜의 시대> 또한 여러 차례 심의를 거친 끝에 2년이 지나서야 겨우 관객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영화가 연일 호황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실로 어렵게 영화를 개봉한 그의 속마음을 한번 들어보았다.
-<불륜의 시대>는 2011년 부산영화제에서 봤었는데 개봉까지 생각 이상으로 오래 걸렸다.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로부터 두번의 반려를 받고 세번 만에 수정을 해서 통과했다. 앞의 두번은 수정 없이 신청을 했었고 이번에는 지적받은 부분의 일부를 모자이크로 처리했다. 늦게나마 개봉해서 기분은 좋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다. 여러 가지로 아쉬움도 남고. 그래도 관객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이미 두번이나 반려를 받았는데 세 번째에 가서야 수정한 이유가 있나. =끝까지 자존심을 지킬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고 내 감정만 가지고 밀어붙이기에는 그간 고생한 배우 와 스탭들에 대한 미안함이 너무 컸다. 관객을 만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송함도 있었다. 등급 위원들도 나름의 고충과 기준은 있을 테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아무 문제 없이 상영됐었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문제가 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실제로 해외에서는 이미 많이 상영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늘 국내보다 해외 관객과 더 많이 만나는 편이었다. <불륜의 시대>는 일본,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몇 개국에 팔렸고 유럽과 아랍 국가들에도 팔렸다. 인도에서는 거의 모든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검열이 심하다는 중국에서조차 그대로 상영되는데 국내에서만 수정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하다. 강조하건대 이 영화는 절대 야한 영화가 아니다. 애초에 그런 의도 자체가 ‘전혀’ 없었다. 노출은 표현 과정에서 있는 자연스러운 장면들일 뿐이다.
-뭐가 문제였다고 생각하나. =62회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받았을 때 외신기자가 성기가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한국에서 문제가 되지 않겠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대한민국은 그렇게 후진 나라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어버렸다. 제발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주면 좋겠다. 이를테면 리안 감독의 <색, 계>에 높은 수위의 장면들이 있었다지만 그 장면 하나가 작품의 잣대가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불륜의 시대>는 인간의 허위의식과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위선에 대한 영화다. 그 과정에서 노출은 자연스러운 거다. 그걸 감추는 게 위선이지. 애초에 청소년이 보라고 만든 영화도 아니고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다. 다 아는데 유독 화면에서만 그런 걸 감추고 가리는 것도 웃기지 않는가. 그게 미술관에 걸린 명화들이 ‘야하다’고 모자이크를 해버리는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걸그룹들의 끊임없는 노출은 괜찮고 이런 영화의 맥락있는 노출은 안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수정된 장면 외에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때와 달라진 것이 더 있다고 들었다. =한 장면이 추가됐다. 갈대밭 장면인데 영화제 이후 추가로 촬영해서 넣었다. 나머지는, 아니 모자이크 처리한 것 말고는 전부 그대로다.
-원제는 <바라나시>였다. =<바라나시>라는 제목을 지은 건 내가 그 도시에서 받은 특별한 인상 때문이다. ‘타운’ 시리즈가 모두 인도의 각종 영화제에 초청된 덕분에 인도를 자주 방문했는데 그때 바라나시라는 도시에서 특별한 인상을 받았다. 테러가 빈번히 일어나면서도 평온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느낌. <바라나시>는 그 느낌을 영화로 옮겨보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한 영화다.
-그런데 개봉과 함께 제목을 <불륜의 시대>로 바꾼 이유가 무엇인가. =<바라나시>라는 제목을 듣고 이 영화가 불교영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웃음) 자칫 제목 때문에 내용이 왜곡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중년의 욕망과 위선, 가면에 관한 이야기다. 두터운 신념조차 욕망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 섹스와 같은 원초적 욕구가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에 대한 영화다. 추상적이고 있어 보이는 제목보다는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제목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야만의 시대’로 지을까도 생각해봤는데 그 제목은 벌써 누가 써버렸더라. (웃음)
-<불륜의 시대>는 ‘타운’ 시리즈 이후에 처음으로 변화를 시도한 영화다. =멜로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일종의 장르 실험이랄까. 전규환이 멜로를 만들면 이렇게 되더라는 식으로. 예를 들면 허진호 감독처럼 멜로를 잘 만드는 대가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 허진호 감독의 방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관습적인 문법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 다른 방식으로도 관객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감독이라면 있는 걸 흉내내는 게 아니라 자기만의 방 식, 자기만의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액션, 멜로, 판타지 뭐든 중심만 확실하다면 관객은 의외로 잘 받아들이고 잘 따라온다.
-2012년 부산영화제에서 공개한 <무게> 역시 그런 맥락의 영화인가. =그렇다. <무게>는 판타지다. 판타지란 장르를 어떻게 다르게 풀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이다.
-<무게>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퀴어사자상을 받기도 했는데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피에타>에 묻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저 팔자려니 한다. (웃음) 막상 작품이 완성되고 난 뒤에는 내 손에서 떠난 거니까 크고 작은 일에 일일이 신경 쓰진 않는다. 그보다 아쉬운 건 국내 관객보다 해외 관객을 먼저, 그것도 많이 만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무게>도 영등위 심사에 걸려 보류 중인 걸로 알고 있다. =안타깝지만 그렇다. 첫 번째 심의에서 불가 판정을 받고 현재 다시 신청을 한 상태다. <불륜의 시대>처럼 일부 모자이크가 아니라 몇몇 장면을 통째로 덜어냈다. 아쉽지만 이게 현실이다.
-사실 관객과의 만남이 어려운 건 단지 등급이나 개봉관의 문제만은 아닌데. =총체적인 문제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건 언론의 태도다. 애초에 영화를 만들 때부터 이 영화를 가지고 손익분기점을 무사히 넘길 것이라고 생각진 않는다. 다만 적어도 사람들이 이런 영화가 있다고 알고는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등급을 무사히 통과하고, 극장에 얼마만큼 걸리고, 얼마만큼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는 그다음 문제다. 대부분의 언론이 블록버스터와 상업영화, 스타들의 가십에만 관심을 가지는 통에 작은 영화들은 그들의 백분의 일도 노출이 되지 않는다. 이런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텐데 그분들이 다양한 영화와 만나는 걸 언론이 막고 있는 거다.
-영화에 대한 노출이 그 정도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일례로 예전 <모차르트 타운>과 <댄스 타운>의 언론 시사회를 가졌을 때 기자가 서너명밖에 오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 처참한 심경이었다. 제작자든 기자든 문화를 만들고 다루는 사람들이 우선 문화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다양성을 생각해줘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모자란 것 같아 안타깝다.
-유독 해외에서 많이 사랑받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나. =나만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전세계에 60억명이 있다면 이야기도 60억개가 있다. 굳이 나까지 나서서 남들이 다 찍는 영화를 찍고 싶진 않다.
-차기작은 결정했나. =<두 소년>(가제)이라는 영화를 준비 중이다. 가족영화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들 의외라고 하더라. 드디어 대중적이 되기로 결심했느냐며 배신이라는 사람들도 있고. (웃음) 동시에 여러 가지를 준비 중이라 확정은 아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무협영화나 액션영화도 찍어보고 싶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