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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마포구 벽서 사건
이송희일(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이선용(일러스트레이션) 2013-02-11

흔히 벽서라고 불렸다. 개인적 감정을 담은 투서도 있었지만, 체제비판적인 익명서도 공개 장소에 게시되곤 했다. 옥사와 사화의 빌미가 되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 때문에 처형되었다. 벽서는 대중매체도 없고 표현의 자유도 없던 시절, 백성이 자기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였지만, 조선의 통치자들은 민심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이를 금지했다. 벽서를 게시한 자는 교형에 처했고, 소지만 해도 곤장으로 처벌했다.

표현의 자유를 헌법에 모셔둔 채 시민의 일반의지를 존중한다는 근대사회의 안온한 안뜰의 누군가가 보기에, 힘없는 백성이 벽서를 게시하고 칠흑 같은 골목으로 사력을 다해 도망치는 풍경은 그렇게 낯설고 기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히나 여기는 골목에 대자보 한장 붙였다는 이유로 청년들이 고문을 당했던 그 악몽의 군사독재 시절을 경유한 한국이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벽서를 금지당한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그것도 ‘더불어 잘 사는 복지 마포’라는 슬로건을 염치없이 마빡에 붙이고 있는 마포구. 오늘날의 벽서인 ‘현수막’을 금지당한 성소수자들이 추위에 떨며 마포구청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지난해 11월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는 현수막을 걸고자 했다. “지금 이곳을 지나는 사람 열명 중 한명은 성소수자입니다”와 “LGBT, 우리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가 현수막 내용의 전부였다. 마포구청 도시경관과는 내용 수정을 요구하며 게시를 거부했다. 그 현수막이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고 “청소년 보호/선도를 방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담당자는 혐오스럽다는 표현을 썼다고도 한다. 심지어 김소연 대통령 후보의 낙선 현수막에 위 문구들이 들어 있자 마포구를 돌아다니며 낙선 현수막을 철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대통령 후보의 낙선 인사 현수막을 이렇게 떼어내는 건 명백한 공직선거법 위반이었지만, 그들은 안하무인이었다. 다른 지역은 멀쩡히 붙어 있는데, 마포구만 그 현수막들이 뜯겨졌다.

반기문 총장의 유엔이 목청 높여 동성애 차별 금지를 외치고,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공공연히 성소수자 인권을 이야기하는 시절이다. 프랑스에서는 12번째로 동성결혼이 합법화될 예정이다. 애초에 문제가 되었던 현수막 문구라는 게 40여년 세월을 거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관용어다. 무슨 거창한 요구 사항도 아니고 “지금 여기 살고 있다”는 최소한의 존재 선언일진대 마포구청 공무원들은 그것조차 극구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마포구청 공무원들의 덜떨어진 국제 감각이나 혀를 내두를 정도의 무식함은 사실 관심 밖이다. 공무원 자격시험만 들입다 공부하다 보니 세상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들의 무딘 인권 감수성과 동성애혐오증으로 공적인 행정을 이렇게 처리하는 건 명백한 사적 폭력이다. 누가 저들에게 사적인 혐오감으로 공적 업무를 처리할 권리를 주었는가. 여기가 동성애를 법적으로 금지하는 탈레반 나라인가? 북한인가? 정히 그 나라들이 좋다면 그곳으로 훨훨 날아가 마음껏 혐오감을 분출하시라.

21세기 한국에 살면서 성소수자들이 벽서 하나 붙이지 못하는 동네가 있다는 건 끔찍한 악몽이다. 서울시를 인권도시로 만들겠다는 박원순 시장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이미 서울시 한가운데 블랙홀이 만들어졌다. 마포구 벽서 사건을 성소수자들만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건 알량한 착각이다. 이런 폭력들을 방관하다 보면, 언젠간 당신들 차례가 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