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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구라의 능력자 발견
이다혜 2013-02-07

<능력자> 최민석 지음 / 민음사 펴냄

이름은 남루한, 직업은 (야설)작가. 통장잔고는 3320원에 월세는 5개월치가 밀려 있다. 전직 (에로)영화 감독으로 지금은 인터넷 (성인)사이트 운영자인 그의 지인의 해설에 따르면 루한씨가 야설작가가 된 것은 이름에서부터 운명지어진 것으로, “네가 남씨이기 때문에, 네 이름은 ‘남자의 크고 넓은 봉우리’를 뜻하는 거야. 너야말로, 이 시대의 짓밟히고 억눌리고 초라해진 남성들의 봉우리를 다시 ‘크고 넓고 거대하고 굵직하게’ 일으켜 세울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보내진 인물이란 말이야.” 하지만 그를 이렇게 소개할 수도 있겠다. 조만간 소설집을 계약할 예정인 등단 작가.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삼촌이라고 부르며 한 남자를 소개한다. 그리고 루한은 삼촌이라 불리는 정신병자이자 전 세계챔피언 복서이자 매미 애호가, 그러니까 매미 에너지 연구는 20년, 복싱은 8년 하고 무도(<무한도전> 말고 舞蹈) 인생은 3년을 보낸, 어딘가 허경영을 연상시키는 공평수의 자서전을 쓰는 일을 맡게 된다(그런데 이 소설 중반에는 허경영의 이름만 바꾼 허경열이 등장한다!). 전세 보증금의 일부가 될 2천만원만 마련해오면 결혼시켜주겠다는 예비 장인(이자 문학계 원로이자 국문과 교수)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자서전의 내용을 몰락한 세계챔피언의 처절한 말로로 정한 루한은 남들이 이런 책 깔보는 건 알지만 상관없다고, 개의치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한다. “어차피 내 이름은 책에 안 넣을 거니까.”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술을 마시다 3차 정도에 들른 대폿집(할 얘기는 얼추 떨어진 것 같은데 집에 가기는 아쉬워서 일단 어디든 들어가 앉은 그런 집)에서 옆 테이블 이야기를 훔쳐 듣는 그런 일 말이다. 앉을 때만 해도 존재감이 없던 남자였던 것 같은데, 별로 작지 않은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무용담이 어째 심상치 않아서 귀를 기울이다가 오히려 이쪽 테이블의 대화가 푹 죽어버리는 그런. 진짜라고 믿기에는 구라가 심한데, 디테일이 어찌나 쫀득하게 이야기에 감겨 있는지 거짓말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아쉬운. <능력자>도 그러해서, 글의 힘이라기보다는 말의 힘을 느낄 수 있고, 서사의 힘이라기보다는 이야기를 듣는 재미에 빠져들게 되며, 거의 모든 장면이 눈앞에 영화 장면처럼 착착 떠오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능력자>는 패러다임의 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대하소설을 꿈꾸면서도 돈 되는 글이라고는 야설과 자서전 대필밖에 쓸 수 없어 몸부림치는 무명 소설가의 애환을 우울하지 않게, 무겁지 않게, 웃기지만 우습지 않게 풀어낸다.

ps. 다 읽고 나서는 뜻밖에도 루한의 아버지이자 평수의 프로모터인 강호라는 캐릭터가 심히 궁금해진다. 가장 통속적으로 예측 가능해 보이는,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책 다른 캐릭터들과 구분되는 독보적인 신비를 쟁취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