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콘서트>의 ‘불편한 진실’에서 마주하게 되는 진실: 현실은 아름답지 않다는 것. 미추야말로 객관성을 따질 수 없는 가치라고들 하지만, 미추에 대한 판단은 거의 순식간에 이뤄진다. 얼마 전 시즌2로 브라운관에 복귀한 <HBO>의 TV시리즈 <인라이튼드>는 굳이 따지자면 김기리와 김지민이 펼치는 오글거리는 판타지보다는 황현희가 희화화하는 현실에 가깝다. 이렇게 현실적이다 못해 찌질한 사람들만 데려다놓은 이야기에 어느 누가 기꺼이 시청자가 되려는지 의심스럽다.
<인라이튼드>라는 타이틀의 사전적 의미는 “계몽된, 개화된”이다. 시즌1은 주인공 에이미 젤리코(로라 던)가 회사에서 난장판을 만드는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던 유부남 상사로부터 배신당한 에이미는 마스카라로 얼룩진 검은 눈물이 범벅이 되어, 상사가 탄 엘리베이터에 대고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욕설을 내뱉는 진상을 부린다. 그 뒤 에이미는 신경쇠약 진단을 받고 하와이의 명상센터에서 2달간 지낸 뒤 180도 돌변해 긍정적인 에너지로 중무장해 돌아오는데, 회사는 에이미를 창문이라고는 없는 지하의 데이터 입력센터로 발령한다. 알고 보니 그곳은 에이미 같은 골칫거리들을 모아둔, 좌천의 전당이었다.
냉랭한 어머니 헬렌(다이앤 래드, 로라 던의 실제 어머니인 여배우)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약물 중독인 전남편 리바이(루크 윌슨)의 삶을 계몽하고, 20년 동안 몸담은 회사를 친환경기업으로 선도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돌아온 에이미는 실망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이미 비참했던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라이튼드> 시즌1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무의미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에이미의 시도는 매번 거절당하고 바닥에 내쳐진다. 사실 그 시도는 에이미 스스로를 위한 것이기에 실패가 거듭될수록 상처는 크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분노가 다시 일어선다. 다시는 보잘것없고 싶지 않은 에이미의 분노는 회사를 선도하겠다는 무한한 긍정을, 회사를 무너뜨리겠다는 부정의 에너지로 바꾼다. TV 에피소드는 이 대목에서 데이터 입력센터에 휘발유를 부어 화염에 휩싸이게 만드는 판타지로 처리한다. 그리하여 신기하게도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꼭 불가능할 것도 없다는 새로운 결론에 도달한다. 시즌2는 내부고발자가 되어 주변으로부터 인정받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에서 영웅이 되고 싶은 에이미의 또 다른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그려질 예정이다.
에이미를 연기하는 로라 던은 <인라이튼드>의 크리에이터 중 한 사람이다. <블루 벨벳> <광란의 사랑> 등 데이비드 린치 감독과의 우정과 협업으로 유명하며, 영화배우 브루스 던과 다이앤 래드를 부모로 두고 자랐다. 감독과 긴밀하게 협업하여 창작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던에게는 배우의 책임 중 하나다. <인라이튼드>의 영감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두편인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와 <네트워크>에서 떠올렸다. 두 영화를 절묘하게 섞어서, 순수한 분노가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를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 크리에이터로서 던이 내놓은 창작의 변이다. 현재 미국사회를 지배하는 99%의 분노가 <인라이튼드>의 중심에 있다고 하는데, 에이미의 적극적인 반격이 기대되는 시즌2에서 그 에너지가 어떻게 표현될지 궁금하다. 재미있는 점은 <인라이튼드>와 로라 던에 대한 글들이 하나같이 실물로 만난 로라 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한 상찬으로 시작해서 <인라이튼드>의 에이미가 얼마나 못난 여자인지로 마무리된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꼭 긍정적이고 아름다워야 경쟁력이 있는 건 아닐 지도 모른다. 내가 <인라이튼드>에서 보는 것은 TV가 지금껏 묵과해온 그 참신한 조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