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마가레테 폰 트로타와 나란히 영화사의 ‘뉴 저먼 시네마’ 항목에 대굵은 글씨로 이름을 올린 이래 베르너 헤어초크(70)는 단편 <헤라클레스>를 만든 17살 이후 다리를 쉬는 일 없이 카메라를 들고 달려왔고 그 행로는 3D 프로젝트(<잊혀진 꿈의 동굴>)까지 다다랐다. 정글에 오페라하우스를 짓고, 배를 끌고 산을 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그의 주인공 피츠카랄도처럼, 헤어초크는 실패할망정 시시한 실패는 하지 않는다. 헤어초크에 관한 일화 가운데 무난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몇 토막만 늘어놓아보자. 그는 18살까지 음악도 안 듣고 노래도 부르지 않았다. 뮌헨 영화학교에서 훔친 카메라로 첫 영화를 찍은 그는, 자신에게는 카메라에 대한 천부소유권이 있으므로 절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1978년에는 작품이 뜸한 동료 다큐멘터리 감독 에롤 모리스를 자극할 요량으로 “에롤이 기획 중인 영화를 끝까지 완성한다면 내가 신발을 먹겠다”고 공약했다가 공개석상에서 천연덕스럽게 구두를 요리해 먹는 장관을 연출했다. 2006년에는 방송 인터뷰 중 공기총으로 저격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터졌으나 “그다지 대단한 총알이 아니다”라며 마저 인터뷰를 진행한 헤어초크의 강심장이 더 큰 화제였다. 현재 LA에 정착한 헤어초크는 <잭 리처>의 배우로서 2012년 9월12일 LA 인터내셔널 프레스 데이에 참석한 기자들 앞에 나타났다. 바그너의 오페라를 인간의 형상으로 옮겨놓으면 이런 느낌일까? 아무리 평범한 질문을 던져도 대하서사극급의 경험담, 경전의 글귀를 방불케 하는 의미심장한 답을 돌려주는 노장의 옆모습을 보며 이분이라면 하루만 동행해도 책 한권 쓸 분량은 너끈히 나오겠다는 직업병적인 속셈을 했다.
-영화감독이 연기를 한다는 건 어떤 경험인가. =1960년대 작은 배역(연쇄살인자 캐릭터)을 시작으로 이따금 연기를 해왔다. 내게 연기는 각본, 연출, 작곡, 편집이나 마찬가지로 내가 동등하게 사랑하는 필름메이킹의 한 측면일 뿐이다. 즉, 연기를 했다고 다른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거나 하는 의미는 없다.
-역시 배우로 일한 하모니 코린 감독의 인디영화 <줄리앙 동키 보이>와 비교하면 할리우드 거대예산 영화인 <잭 리처>의 현장은 어떻게 다르던가. =모든 것이 좀더 쉬웠다. <줄리안 동키 보이> 때는 일단 정해진 대사가 없었다. 가족이 저녁식사하는 장면을 찍는데 한명은 머리가 돌아서 살인을 했고, 하나는 누이를 임신시키고…. (웃음) 정신 나간 맏아들이 나한테 시를 선물하면 후졌다고 물리친다는 설정만 알고 현장에 갔는데 모르는 새에 카메라는 이미 돌고 있었고 감독한테 뭐라고 대사를 하냐고 물으니까 “그냥 말씀하세요” 하더라. (좌중 폭소) 할리우드 주류영화는 큰돈과 책임이 걸려 있고 전세계의 폭넓은 관객을 염두에 두고 만들기에 상황과 태도가 반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영화 만들기는 똑같다. 국제적으로 애 만드는 방법이 똑같은 거나 마찬가지다.
-<잭 리처>의 밥차(catering) 예산이 독립예술영화 감독인 당신 작품 한편의 총제작비에 맞먹을 수도 있다. 이런 자본의 격차가 영화나 감독, 배우에게 만드는 차이가 있다면. =영화에서 문제는 항상 빛, 소리, 카메라, 감독, 좋은 배우와 좋은 이야기의 에센스로 귀착된다. 물론 산업화된 할리우드 시스템에서는 스탭 수가 어마어마하지만, 현장에서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에는 결국 3∼5명의 문제로 압축된다.
-<잭 리처>의 주요 촬영지인 피츠버그에 젊은 시절의 추억이 있다고 들었다. =지급받은 장학금으로 피츠버그에서 공부할 계획이었는데 도착하자마자 오판이었음을 깨달았다. 돈을 반납하고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가는 교통편을 놓쳐 한달간 노숙을 했는데 한 아주머니가 거리에서 나를 주워 다락방에 반년간 기거하게 해주었다. “이미 육남매가 있는데 일곱인들 뭐가 다르겠냐”면서. 피츠버그는 독일계 이민이 많은 도시지만 그 가족은 미국인이었고 내가 만난 최고 중 최고였다. 스물두살이 된 나는 돈을 벌려고 미 항공우주국을 위해 로켓 발사 시스템에 관한 독립영화를 만들었는데 원자로 관련 내용이 있다 보니 보안을 점검하던 중 교환학생 비자 지위가 들통났다. 독일로 추방되기 싫었던 나는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도망쳐서 6개월을 살았고…. (계속하면 끝이 없다는 듯 갑자기 함구한다.)
-<악질경찰>의 니콜라스 케이지나 <레스큐 돈>의 크리스천 베일을 보면, 감독으로서 오버액팅 스타일의 연기를 선호하는 것 같은데 본인 연기는 미니멀해서 흥미로웠다. =(단호히) 니콜라스와 크리스천은 오버액팅을 한 적이 없다. 다른 감독의 영화에서는 어땠는지 모르나 내 영화에서는 테마에 맞게 연기한 것뿐이다. 닉 케이지나 클라우스 킨스키나 내 배우들은 모두 훌륭했다.
-불가능한 야심, 현실의 스케일을 넘어선 욕망을 가진 인물을 그리는 데 일가가 있는데…. =(질문을 자르며) 야심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내 캐릭터 중 야심가는 아무도 없다. 그들은 비전을 가진 거다. 야심은 커리어를 추구하고 비전은 시(詩)를 지향한다는 점이 다르다.
-무엇이라고 부르건 보통 영화에서 그런 속성은 악인 캐릭터에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잭 리처>에서도 악인을 연기했는데 영화에서 매력적인 악당의 조건은 뭐라고 생각하나? 좋은 악인 캐릭터란 어떤 재료로 빚어지나. =아름다운 질문이지만 너무 방대한 이야기라 시간이 종일 걸려야 답하겠다. 내 생각에 매력적 악인은… 입을 떼기 전에도 위험한 인물이다. 큰 총을 들었거나 고함을 쳐서가 아니라 매우 부드럽게 무서운. 그 점에서 <잭 리처> 제작진의 캐스팅은 현명했다. (좌중 웃음) 나, 스크린에서 무서워 보이던가? (일동 끄덕) 그럼 다 잘된 거다.
-입을 떼기도 전에 위험한 느낌은 연기자의 천성에 포함돼 있나.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진짜 악당이 내 안에 있는 건 아니다. 내 아내한테 물어보면 내가 얼마나 헐렁한 남편이며 훌륭한 요리사인지 증언 해줄 거다. 특히 양고기 요리. (좌중 폭소) 스크린에서 본 걸로 배우의 실제 본성에 관한 결론을 도출하려고 너무 애쓰지 말라.
-영화사에서 좋은 악역의 예를 든다면. =에드워드 G. 로빈슨, 그리고 제임스 캐그니가 연기한 캐릭터들.
-당신의 고국인 독일도 영화강국이지만 어린 시절 매료된 미국영화가 있다면. =없다. 왜냐. 외딴 산골에서 살아 영화관은커녕 전화, 라디오, 전기, 수도도 없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썼다. 17살까지 영화를 못 봤을뿐더러 영화의 존재도 몰랐다. 첫 전화 통화도 그때 했다. 순회 영사기사가 학교에 와서 처음 영화를 봤는데 그닥 좋은 영화는 아니었다.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것이 분명해지면서 19살에 내 자신의 첫 영화를 연출했다. 내 전기 이야기는 그만하고 <잭 리처>로 돌아가자.
-앞서 다른 배우와 감독을 인터뷰하면서 들었다. 톰 크루즈가 체온유지용 욕조에서 나올 때 몸에서 피어오르는 증기가 분노를 표현한다며 없애지 말고 그냥 찍자고 제안했다던데. =스탭들은 톰의 몸에서 증기가 사라지길 기다리며 우연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나는 주먹싸움을 방금 마치고 돌아온 인물이 김을 뿜다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생각했다. 그건 그저 내가 다른 부류의 감독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분한 캐릭터 더 제크는 악의 핵심이지만, 정작 관객이 그의 사악한 행동을 볼 수 있는 장면은 없다. =더 제크는 총도 없고 예의도 바르다. 난 그냥 순수하게 악할 따름이다. 더 제크의 과거사에도 관심이 없었다. 설정대로 러시아 억양을 써야 하나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결국 상관없다고 결론짓고 평소의 나처럼 바바리아 악센트로 했다. 더 제크가 소비에트 굴락(수용소)에서 지낸 동독인일 수도 있으니까. 가짜 러시아 억양을 연기하려 애썼다면 바보스런 결과가 나왔을 거다.
-그렇다면 독일 개봉판에는 직접 당신이 독일어 더빙을 할 것인가. =대사가 독일어가 되면 내가 억양이 없는 셈이 되니까 다시 폴란드나 러시아 억양으로 연기해야 하나? 그러느니 동유럽계 성우가 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특수렌즈를 끼는 등 분장을 했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당신 자체의 존재감으로 충분한데 좀 과잉으로 보였다. =의안이 좀 불편하긴 했지. 무섭게 보이려고 영화 내내 눈 한번 깜박 안 하려고 애썼는데 아무도 눈치 못 채더라. (좌중 웃음)
-<잭 리처> 같은 규모의 영화를 직접 연출하고 싶은 욕구도 있나. =예산의 관점이 아니라 스케일 면에서는 만들어보고 싶다. 톰 크루즈와 작업하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사람들이 원작의 잭 리처가 장신이었다고 캐스팅에 불만을 표하는 모양인데 그래서 뭐? 아프리카계 미국인 제시 노먼은 그리스 비극의 엘렉트라를 연기했다.
-같은 감독으로서 크리스토퍼 매쿼리 감독에게 연기연출을 받는 일이 불편하진 않았나. =전혀. 내가 결코 하지 않을 일이 있다면 배우로 일하러 간 현장에서 다른 아이디어를 내세우며 감독에게 충고하는 거다. <잭 리처>는 크리스의 영화이고 그는 텍스처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감독이다. 로자문드 파이크와 톰 크루즈 사이에 러브 신이 없어도 둘 사이에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음을 관객이 알 수 있고, 더 제크가 부하를 끈질기게 주시하는 것만으로 제 손가락을 물어뜯을 정도로 압박하는 장면이 성립하도록 만드는 힘이 텍스처다. 연출의 관건은 배우를 한명 세워놓고 거기에 또 다른 요소를 보태서 뭘 잘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텍스처다.
-요즘의 독일영화 혹은 유럽영화에 대한 견해는. =아무 생각 없다. 독일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8, 9년 전이다. 더 이전에 본 것은 20년 전이고.
-차기작 <사막의 여왕>(Queen of the Desert)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 =투자가 완결되지 않았고 원하는 촬영지 몇곳에 문제가 생겨 두고봐야 한다. 하지만 다른 장편도 있고 내년 9월까지 일곱편을 만들 예정이다. (기자들이 경악하자) 52분짜리도 있고, 더 짧은 작품도 있으니 좀 허풍 떤 거다. 다음주엔 텍사스 사형수 형무소에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On the Death Row>). 원체 촬영도 편집도 빠르다. <악질경찰>의 편집은 2주, <그리즐리 맨>은 9일이 걸렸고 <아들아, 아들아 무슨 짓을 한 거냐>는 크랭크업 5일 만에 파이널 컷을 뽑았다.
-할리우드는 당신을 사랑할 게 분명하다! =<악질경찰>은 촬영이 보통 오후 2, 3시면 끝나버려 더 할 일이 없었다. 다음 로케이션 준비가 내 속도를 못 따라왔고 다음 장면의 배우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남기 일쑤였다. 초조해진 스탭들이 “커버리지(여러 각도와 크기로 여분 컷을 찍어 유사시 편집할 재료로 쟁여두는 것)라도 찍고 있을까요?”라고 물어왔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서 몰래 조감독을 불러 물어봤다. 보험 관련 이야기냐고. (좌중 폭소) 니콜라스 케이지가 그런 나를 보고 “모두 주목! 마침내 자기가 뭘 하는지 아는 감독님이 오셨습니다!”라고 박수를 주도하기도 했다. 결국 260만달러 예산보다 덜 쓰고 일정보다 2일 앞서 완성했다. 프로듀서들이 나랑 결혼하고 싶어 한다. (일동 폭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