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사람은 다 안다. <씨네21> 손홍주 사진팀장이 드라마 <추적자 THE CHASER>(이하 <추적자>)에 출연한 손현주의 형이라는 사실 말이다. <씨네21> 기자들만 알고 있는 사실은 따로 있다. 손홍주 사진기자가 취재원을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제가) 배우 손현주의 형입니다.” 동생을 알리고 싶은 형의 마음이다. 동생 덕에 더 좋은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이제는 손홍주 기자가 그렇게 동생을 알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추적자>의 백홍석이 되어 시청자와 함께 뛰고, 또 뛴 손현주가 지난해 마지막 날 SBS 연기대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가 누구인지, 어떤 배우인지 사람들은 다 안다. 현재 장철수 감독의 신작 <은밀하게 위대하게>(출연 김수현, 박기웅, 이현우, 손현주 등)를 촬영 중인 손현주를 만나 대상 수상 소감부터 다시 물었다.
-지난 연말 SBS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예상은 했나. =전혀. 방송 들어가기 전 한 인터뷰에서 “절대 그런 일은 안 일어날 거”라고 얘기했다.
-방송국이 수상 사실을 수상자에 미리 알려주지 않나. =SBS는 미리 알려주지 않더라. 뭐, 집에서 보는 것보다 방송국에 나와서 몇 시간 앉아서 보면 훨씬 재미있다.
-수상 소감이 화제였다. “지금도 어디선가 밤을 새우고 있을 스탭과 연기자들, 또 이 일이 아니더라도 각자 맡은 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수많은 개미들과 이 상의 의미를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소감도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 성격상 “숟가락 하나 얹었다” 같은 멋진 표현을 쓸 줄 모른다. 그런 표현을 좀 쓰면 좋겠는데. 수상 소감은 생각나는 대로 얘기한 거다.
-미처 꺼내지 못한 말도 있을 것 같다. =극중 아내와 딸 수정이 얘기를 못했다. 백홍석의 아내 역을 맡은 김도연씨. 출연 비중이 작은 까닭에 정말 누구도 하지 않으려고 했던 나의 아내가 되어줘서 고맙다. 촬영 내내 백수정이라는 이름으로 힘을 실어줬던 이혜인양, 너무 고맙다.
-드라마 종영 뒤 한동안 백홍석에게서 빠져나오기 힘들었을 것 같다.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다른 작품을 몇달 동안 못했다. 대신 사무실에 들어온 영화 시나리오와 드라마 시놉시스를 많이 읽었다. 완성도가 있는 작품도 없는 작품도 있었지만 모두 재미있게 봤다. 그렇게 백홍석에게서 빠져나와야 했다. 나와야지.
-종영된 지 한참 지난 지금, 여전히 떠오르는 장면은 없나. =왜 없겠나. 여러 장면이 떠오른다. 딸과 아내를 잃었을 때 백홍석의 외로운 마음, 홀로 법정에서 고군분투하는 그의 모습 등. 특히 수정이의 수술실 앞에서 <클레멘타인>을 부르는 장면은 정말 가슴 아프게 찍었다. 스탭들이 많이 도와줬다. 감정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주기도 하고. 몇 시간 뒤에 다시 찍을 수 있게 배려도 해줬다.
-되돌아보면 <추적자>는 배우 손현주에게 어떤 작품으로 기억될까. =예전에는 드라마가 끝나면 복기를 가끔 했다. <추적자>는 복기를 안 했다. 촬영 중에도 드라마를 잠깐밖에 보지 못했고. 그만큼 특별한 작품이었다. 앞으로는 <추적자> 같은 드라마가 안 나왔으면 좋겠다.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면 안 나오겠지.
-수염을 기른 건 현재 출연 중인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맡은 김태원 역 때문인가. =그렇다. 북한 인민군 김태원 대좌는 아이들을 살인병기로 키워 남한에 보내는 특수부대를 이끌고 있다. 어느 날, 특수부대가 북한 정부에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남한 정부는 남한에 있는 이들의 명단을 요구하고, 김태원은 아이들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린다. 세명의 아이들이 당의 명령에 불복종하자 김태원은 이들을 직접 죽이기 위해 남한으로 내려온다. 그런 내용의 영화다.
-원작인 최종훈 작가의 웹툰은 봤나. =안 봤다. 방해될까봐. 직접 김태원이라는 남자를 끌어내고 싶었다. 그는 영화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 장면을 책임지는 캐릭터다. 관객이 김태원을 보고 손현주라는 것을 몰랐으면 한다.
-<추적자>가 끝난 뒤 많은 작품이 들어왔을 텐데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 =김태원 같은 센 역할이면 백홍석을 한번에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추적자>나 백홍석에 기대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나. =전혀. 보통 드라마가 끝나면 캐릭터를 잊기 위해 단막극이나 특집극을 찾아간다. 지금도 누가 단막극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출연시켜달라고 한다. ‘돈 못 준다’고 하면 ‘오케이’한다. 누가 돈 달라고 했어. 그건 돈과 상관없이 하는 거다.
-옛날 얘기 좀 해보자. 태어난 뒤 4, 5살까지 말을 안 했다고. =가족들은 언어장애자인 줄 알았다더라. 그러다가 꺼낸 첫마디가 엄마도, 아빠도 아닌 라디오 드라마 제목이었다.
-드라마를 할 운명이었나보다. (웃음) 중앙대 연극영화과 84학번으로 입학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배우를 꿈꾸게 된 계기가 뭔가. =사실 목회(牧會)를 하고 싶었다. 신학을 배우고 싶었다. 아버지 역시 목회를 하시다가 진로를 바꾸셨고.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이화예술극장에서 본 적이 있는데 새로운 세상이었다. 성극 같지 않은 성극도 꽤 많더라. 이쪽 교회에서 한 성극을 저쪽 교회에서 열어주고, 조잡했지만 조명 같은 것도 대여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무대를 접하게 됐다.
-대학 시절 어떤 학생이었나. =철공소에서 왔는지, 목공소에서 왔는지 모를 작업복을 입고 무대에서 살았다. 학교생활을 소홀히 하진 않았지만 연애를 많이 하지 않은 건 좀 후회된다. (웃음)
-졸업 공연으로 <햄릿>을 올렸다. 주인공 햄릿을 맡았다. 손현주의 <햄릿>은 어떤 작품이었나. =중앙대는 지금까지 졸업 공연으로 <햄릿>을 몇번 안 올렸다. 당시 3주 동안 오디션을 봤다. 선왕, 햄릿, 폴로니어스, 오필리어 등 서로 다른 배역을 돌아가면서 연습했다. 중간에 몇명은 제 풀에 지쳐 떨어져나가기도 했다. 최종 3명이 햄릿 후보로 올랐다. 몇날 며칠을 바꿔서 하다가 최종적으로 햄릿을 맡을 수 있었다. 당시 <햄릿>을 비롯한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한국적인 발성으로 연기하는 배우는 없었다. 전부 외국 배우처럼 폼을 잡았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란 대사는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걸 느리게 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단번에 말했다. 폼을 안 낸 <햄릿>이었던 것 같다.
-졸업한 뒤 극단 미추에 들어갔다. 어땠나. =마당극을 주로 했다. 마당극은 주인공이 없다. 다 주인공이다. 무대에 올라가면 1인15역을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그때 경험이 지금까지 큰 힘이 되고 있다. 방송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나는 왜 주인공을 못하지’ 그런 생각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때 곱창 장사도 병행했다고. =내 돈 주고 한 건 아니고. 선배의 친구가 운영하던 포이동 곱창집에서 일했다. 마장동 가서 고기 떼와서. 재미있더라.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됐다.
-KBS 탤런트 14기다. KBS 드라마 <형>(1991)은 시청자가 배우 손현주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된 작품인 것 같다. =이름있는 배역을 처음 맡은 작품이었다. 낙천이라는 머슴이었다. 김운경 작가가 쓰고, 돌아가신 황은진 PD가 연출했다. 두 사람은 잊을 수 없는 은인 같은 분들이다.
-드라마 중간에 하차하게 되어 술자리에서 울었다고. =야속하게 빼더라고. 드라마에서 세월이 지났다고. (웃음) 그래서 술자리에서 울었다. 황은진 PD가 “낙천이 걔, 세월이 지나도 나오게 하면 안돼?”라고 김운경 작가한테 말해줬다. 김운경 작가가 “사내놈이 그런 걸로 우냐”며 송경철 선배와 복덕방에 나오는 설정으로 넣어줬다.
-드라마 <첫사랑>(1996)의 주정남도 생각난다. 송채환씨와 함께 부른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도 인기를 모았고. 그때 밤무대 출연 제의가 많이 들어왔다고. =음반 내자는 제의도 많았고. 그런데 다 뿌리쳤다. 돈이 무서웠고 내가 할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했다면 돈을 많이 벌었겠지.
-드라마든 영화든 대본이 깨끗한 것으로 유명하더라. =학교 다닐 때는 연극 대본에 많은 것을 썼다. 호흡, 포즈, 대사 등. 이렇게 써놓다보니 대본에 갇히게 되더라. 그러면서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되고. 방송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뭘 체크하지 말자 생각했다. 내 대사에만 동그라미를 치게 되면 내 것만 보이게 된다. 남의 대사가 무슨 말인지 알고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진 감독의 <기막힌 사내들>(1998), <간첩 리철진>(1999), <킬러들의 수다>(2001)에 출연한 이후 드라마에 비해 영화 출연작이 적다. =사람은 다 때가 있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애써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영화도 그렇다. 나중에 좋은 시나리오가 들어오면 할 수 있는 거다.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들어온 것처럼. 성격상 안달복달하지 않는다.
-<추적자> 출연하기 전, 많은 드라마에 쉴새없이 출연했다. 피로감은 없었나. =피로감은 있었다. 그러나 배우 얼굴에 분이 마르면 안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다. 드라마를 놀이터라 생각하고 많이 출연했는데, 어느 순간 편해지더라. 오히려 녹화하는 날이 즐겁고.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끝나면 허정 감독의 <숨바꼭질>이라는 작품이 기다리고 있다. =크랭크인이 1월30일이다. 시나리오를 즐겁게 봤다. (손등을 문지르며) 결벽증이 있는 남자다. (테이블 위에 있는 기자 수첩을 똑바로 놓으면서) 흐트러진 것을 아주 싫어하고.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김태원을 두고) 이제 애들 죽이러 전주에 내려갈 시간이다. (웃음) =하하. 무자비하게…. (일동 폭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