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난해, 류상욱은 문득 앙드레 바쟁을 언급하며 ‘데일리 크리틱’이란 말을 꺼냈다. 이어 바쟁이 뜻하는 바를 완전히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매일 영화에 대한 글을 썼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필자처럼 게으른 사람은 꿈도 못 꿀 일이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암을 선고받고 한해를 넘긴 이가 바로 내 앞에서 태연하게 했던 말이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류상욱은 성실하게 글을 한편씩 써나갔고, 그런 글들이 모여 한권의 책이 출간됐다. 2007년, 류상욱은 가족과 함께 홀연히 싱가포르로 떠났다. 그리고 ‘익스트림무비’라는 웹진에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정성일 선생의 추천으로 월간지 <키노>에 썼던 글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글이었다. ‘한국에 영화학이 있는가?’라고 호기롭게 질문하던 때는 자연스레 사라졌고, 어느새 그는 영화와 자유롭게 대면하고 글은 유연하게 푸는 시기에 도달했다. 수도승이 면벽하며 자신의 화두와 싸우듯이, 그는 오로지 영화와 마주해 읽기를 원했다. 그렇게 쌓인 그의 글에선 해탈한 자의 부드러운 미소가 읽힌다. 영화 정보로 거의 다 채운 리뷰와, 인용과 카피와 어색한 표현을 남발하는 비평이 주변에 널린 지금, 어떤 지적 허세나 가면을 쓰지 않은 류상욱의 글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러면서도 영화와 인간에 단단한 바탕을 두고 있기에 영화의 감동을 처음 접했을 적의 순수함마저 되찾게 한다. 200여편의 글에서 골라낸 117편 글의 표정은 제각기 다르다. 긴 에세이 같은 글이 있는가 하면, 단호하고 날렵한 글도 있다. 두번에 걸쳐 고쳐 쓴 <다우트>에선 식지 않은 열정이 엿보이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글인 <레인>에는 웃음이 머물며, <심플 라이프>에선 삶과 죽음에 관대해진 자의 시선이 느껴진다. 책머리에서 류상욱은 ‘사는 것은 지상 명령’이라고 했다. 지상 명령을 따르면서 그가 했던 일 가운데 큰 부분은 ‘그를 위로해준 영화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한권의 책으로나마 그의 고된 작업이 결실을 맺어서 나는 행복하다. 그 행복은, 다시 한편의 영화를 더 찾아 사랑하라고 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