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여주인공 수정은 부잣집 아들 재민과 동거하는 중에 그의 약혼녀가 일하는 곳이자 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화랑에서 일한다. 재민은 물론, 수정을 좋아하는 인욱도 그녀에게 “거기 꼭 나가야겠어? 오기야 자존심이야”라며 그만둘 것을 종용한다. 수정은 두 남자가 화를 내건 달래건 듣지 않는다. 재민의 재력도 인욱의 학벌도 갖추지 못한 그녀에게, 팁으로 먹고사는 노래방 도우미 같은 아르바이트가 전부이던 그녀에게, 전화받고 청소하고 은행 심부름이나 가끔 하면서 한달에 백만원이 보장되는 일자리는 자존심 ‘따위’로 그만둘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을 읽다가 그 장면이 생각났다. <인간의 조건>은 단순히 일이 힘드네 박봉이네 하는 표현으로 묘사될 수 없는, 드라마 속 수정의 일자리와도 퍽이나 다른 몇몇 일자리에 관한 체험보고서다.
진도에서 꽃게잡이를 한 것을 비롯해, 서울의 편의점과 주유소, 아산의 돼지농장, 춘천의 비닐하우스, 당진의 자동차 부품 공장 등이 그의 일터가 된다(6장만이 그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타인의 삶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꽃게잡이 배에 탄 그는 미쉐린 타이어의 마스코트가 지명수배자로 분장한 모습 같은 남자로부터 “너 깨끗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전과가 있느냐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원래 내가 속해 있던 세상에서 ‘전과가 있다’는 말은 F학점을 받은 수업이 있다는 의미였다”. 취향이나 이상으로 선택할 리 없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남자들은 새로 온 남자에게 ‘어쩌다’ 바다까지 오게 되었는지 물은 것이었다. 돼지 똥을 푸는 일을 하는 대목을 따라가다보면 그 지독한 피로를 잊기 위해 새로운 피로를 더해 피로에 마취되는 수밖에 없다는 문장에서 절로 힘이 쭉 빠져버린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이런 일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없어서는 안된다. 게다가 그들이 힘든 만큼 돈을 받는다면 우리는 이제 삼겹살을 쉽게 사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안심하시라. (쓴웃음) 한승태는 이 책 속의 그들보다 쉬운 방법으로 돈을 버는 우리를 비난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자신의 경험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그의 유머감각은 발군이다. 고시원 방에서 폐소공포증과 아늑함을 동시에 느껴본 사람이라면 “나는 어느 전자제품 매장에서 이 방 크기만 한 벽걸이 텔레비전을 본 적이 있다”는 말에 한숨을 토해내고 말 것이다. 같은 방을 쓰는 남자가 괜찮은 사람 같다는 판단 기준은 이렇게 제시된다. “그는 열한시쯤 불을 끌 때까지 한 문장 안에 ‘사랑해’와 ‘씨발’을 함께 사용하며 여자친구와 통화를 했다.” 마지막으로, 초현실적으로 유머러스한 동시에 살풍경한 이 책에서 가장 애절한 대목은 책 제목을 출판사의 권유로 바꾸어야 했던 일을 구구절절이 적은 서문이다. 그가 원했던 제목 <퀴닝>은 그 뜻풀이를 보면 참 멋진데, 그렇게 긴 설명이 없이 이해 불가한 제목이라니 출판사가 만류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