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사람 쓰는 방식에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대신 욕을 먹는 현대적 의미의 ‘가게무샤’는 꼭 한명씩 두는 것 같다. 대선 기간 ‘튀는 여자’ 욕은 진생쿠키 김성주 언니가 들었다. 한때 전여옥 오빠(이분도 아무리 봐도 오빠야)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인수위 수석대변인으로 고른 윤창중씨도 그런 취지였을까? 그러기엔 첫 인선이고 비중도 컸다. ‘왜 저런 사람을 옆에 두지?’ 의아스러운 정도를 넘어서는, 새누리당에서도 당혹해하는 ‘전력’의 소유자다. 이쯤 되면 방어가 아니라 의지이다. 혹자는 당선인이 윤씨의 칼럼을 제대로 읽지 않았으리라고 하는데, 읽었으리라고 본다. 그가 쓴 박 당선인에 대한 글만큼은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다(격정이 지나쳐 비문과 오문투성이인 건 열외로 하더라도). 그야말로 “박근혜 유전자에는 배신에 대한 치 떨리는 분노가 잠재돼 있”(대선 직후 글)어서일까. 다들 이렇게 나한테 로열티 있게 하라고 분명히 알리고 싶으셨던 거다. 아, 외로운 레이디가카. 안목이 너무… 슬프다.
일본의 기틀을 닦은 세 통치자를 비교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선물 받은 새가 울지 않자, 울지 않는 새는 죽여라(오다 노부나가), 어떡하든 울게 만들라(도요토미 히데요시), 울 때까지 기다리라(도쿠가와 이에야스) 했을 거라지. 우리의 당선인은 어떤 길을 갈까.
광주 시민단체들이 재바르게 연 대선 평가토론회에서 나온 말들이 매섭고 무섭다. “민주당 일부가 ‘민주’ 가지고 밥 먹고 사는 것이 버릇이 됐다.” “민주당에 대한 전략적 선택은, 광주 시민들에게 더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광주 사람들이 1987년 노태우 신군부에 정권을 고스란히 내줄 때보다 더 참혹해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짐작이 간다. 민주통합당의 가장 큰 잘못은 독점하면서도 책임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계파’의 맥락도 안 보인다. 가치도 철학도 경험도 아닌, 일종의 ‘식솔’ 같다. 누가 친노이고 비노인지, 뭐가 주류이고 비주류인지, 왜 물러나야 하는지, 뭘 잘못했는지 자기들끼리의 ‘은어’로 싸운다. 새가 울지 않는다고 자기가 울어버리는 정치인들이라니.
억지 희망보다는 솔직한 절망이 낫다. 1987년 말 <한겨레> 창간모금의 유명한 슬로건 ‘민주화는 한판 승부가 아닙니다’가 새삼 떠오르는 나날이다. 두판 승부도 아니구나. 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