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 당시 가장 친했던 친구가 어느 날 정색이 돼서 내게 끔찍한 비디오테이프를 봤다고 얘기했다. 사람들이 눈알이 빠지고 배가 갈라진 채 죽어 있는 실제 영상을 봤다는 것이었다. 내가 깜짝 놀라 그게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친구는 자신과 가족의 고향에서 국군이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고, 그 비디오테이프에 당시 일어났던 일이 담겨 있다고 설명해줬다.
내가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놀랍게도 ‘신고를 해야 하나?’ 하는 거였다. 어릴 때라 뭐가 뭔진 잘 몰랐지만 왠지 그 친구가 말하는 내용이 학교에서 들었던 ‘간첩’의 그것과 뉘앙스가 비슷해서였다. 하지만 그 친구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였다. 내가 어디서 누군가에게 맞고 있다면 가장 먼저 달려와서 함께 싸워줄 그런 친구 말이다. 난 일단 그 친구의 말을 끝까지 조용히 듣기만 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에 걸어오면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내일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말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 당장 경찰서에 가야 하나? 112로 전화를 해볼까? 아니 그래도 친구인데 신고하면 의리를 저버리는 게 아닐까? 내가 신고해서 그 친구가 잡혀가면 어떡하지? 그렇다고 아무 말 안 하고 있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나까지 혼나지 않을까?
갑자기 찾아온 혼란으로 어린 나의 머리는 너무 아팠다. 도저히 스스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끙끙대다 결국 난 이 사실을 부모님께 털어놨다. 혹시나 혼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한 채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부모님은 조용히 듣기만 하셨다. 그리고 알았다고, 굳이 신고할 건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말을 다른 사람들에겐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도 하셨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뭔가 큰 바윗덩이를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그 일은 곧 내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난 다시 그 친구와 재미있게 뛰어놀았고 끔찍한 비디오테이프가 아닌 주윤발이 나오는 홍콩영화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서 같이 봤다. 모든 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 그 친구 역시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디오테이프 얘기는 다시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가끔, 무언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 친구가 나와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때마다 그게 혹시 바로 그 비디오테이프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성격이 다르거나 취향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비디오테이프에 담긴 친구의 고향이 서울 토박이인 나와 다른 것이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면 왠지 무섭고 불안하고 죄책감 같은 것들이 함께 느껴졌다.
기억력이 안 좋다고 주위에서 공인(?)받은 내가 이 작은 에피소드를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건 실로 경이로운 일이다. 친구의 말을 듣고 요즘 말로 ‘멘붕’이 돼서 걸어오던 150번 종점길의 어둑함과 쌉쌀한 공기 냄새가 지금도 생생하다. 왜일까? 도대체 왜 그토록 내게 생생한 걸까?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것이 아마도 내가 태어나서 최초로 느꼈던 ‘자기 검열’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천방지축 말썽꾸러기였던 나는 그때 처음으로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어떤 힘에 대한 ‘공포’와, 그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자기 검열’을 경험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회피와 외면, 그로 인한 죄책감과 자괴감 역시 처음이었다.
물론 그땐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