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같이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지만 연말을 맞으니 마음 한구석에서 온기가 올라온다, 라고 쓰려고 했다. 필시 그렇게 쓰게 되리라고 믿었으나 그리 되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그저 추울 뿐이다. 5년 동안 얼음 터널을 지나왔던 것 같은데 또다시 5년간 동토에서 헤맬 생각을 하니 아뜩하다. 덜덜 떨린다. 지난밤 선거 개표방송을 보다가 멘붕에 이르면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라는 정신과 의사가 정리했다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가 떠올랐다. 말기암이라는 통보를 받았을 때 대부분의 환자들이 1단계 부정으로부터 시작해 2단계인 분노와 3단계인 타협, 그리고 4단계 침체(절망)를 거쳐 마침내 5단계인 수용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이다. 아직은 실감나지 않아서 그런지 멘붕 2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어쩔 수 없이 5단계에 이르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니 답답하다.
그 5단계 중 어딘가를 지나고 있을 당신들께 위안이 될지 모르겠으나 송년호를 맞아 2012년 영화계의 알찬 성과를 축하하는 특집기사를 준비했다(큰 위안이 되지 않으리라는 건 우리도 안다). 올해의 영화와 영화인들을 떠올리면서 잠시라도 행복한 미소를 머금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에 어느 해보다 정성껏 만들었다. 각자의 생각과 취향에 따라 어떤 결과에는 동의할 것이고 어떤 결과에는 강력 반발하겠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해주시기 바란다. 아무튼 올해의 한국영화 1위로 꼽힌 <다른나라에서>의 홍상수 감독을 비롯해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된 정지영 감독, 올해의 남녀 배우로 추앙된 이병헌과 조민수라는 두 명배우, 올해의 제작자로 뽑힌 최용배 대표 등 모든 분들에게 고생하셨다고, 축하드린다고,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만약 우리가 선정한 영화들을 아직 보지 못했다면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꼭 한번 살펴보시고 자신만의 ‘올해의 리스트’를 만들어보는 것도 (갑갑한 마음을 떨치기에도) 좋을 듯하다. 아쉽게도 <씨네21>이 꼽은 올해의 영화 10위 안에 들지는 못했지만 지금의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민병훈 감독의 <터치>도 꼭 함께 보시라고 추천하겠다. 이 영화 속 주인공 부부는 거듭된 시련과 고통, 슬픔을 맞이한다. 조금이나마 상황이 나아지는 듯싶으면 이내 더 큰 고난이 찾아온다. 이 영화를 권하는 건 부부가 그 험난한 위기를 극적으로 극복하고 해피엔딩을 맞이하기 때문이 아니다. 외려 이 영화는 그들에게 어떠한 희망도 건네주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그 시련과 고통과 슬픔을, 그야말로 살아간다. 꾸역꾸역, 아슬아슬하게, 비틀거리면서 말이다. 우리가 지금 가져야 하는 건 거짓된 희망이 아니라 절실한 절망과 그럼에도 어떻게든 버티겠다는 의지인지도 모른다. <터치>는 그런 점에서 진심어린 위안을 주는 영화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의 애매한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까닭 모를 울음이 빵 터졌던 것 같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