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광과 ‘그 사람’과의 인연은 무려 17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MBC 드라마 <제4공화국>(1995)에서 장광은 노신영 역할을 맡았다. 노신영은 한때 ‘그 사람’의 후계자로까지 지명됐던 인물이다. “당시 전두환씨 역할을 했던 배우(박용식)하고 마주 앉은 장면을 찍다가 고(석만) PD가 갑자기 ‘그만, 스톱!’ 그랬다. 번갈아 찍는데 누가 전두환인지 헷갈린다면서 나보고 실내장면이지만 모자를 쓰라고 하더라.” 3년이 흐른 뒤, 이번엔 ‘그 사람’의 후계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직접 장광을 찾았다. SBS 드라마 <삼김시대>(1998)에서 ‘그 사람’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사람’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저조한 시청률에 드라마는 조기 종영됐고, 이후 ‘그 사람’은 그를 다시 찾지 않을 듯했다. MBC 드라마 <제5공화국>(2005)에서 ‘그 사람’은 그가 아니라 이덕화의 몫이었다. 만약, <26년>이 제때 만들어졌다면, 장광과 ‘그 사람’의 인연은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장광의 오랜 집착을 <26년>을 관람한 관객은 실감했으리라.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조 내관 역으로 같은 지면에서 인터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만남을 청한 건 10여년 동안 ‘그 사람’을 놓지 않은 그의 끈질긴 마음이 궁금해서였다.
-<광해, 왕이 된 남자>로 인터뷰했을 때가 불과 석달 전이다. =정재영씨가 그랬던가. <내가 살인범이다> 200만명 돌파 기념 식사 자리였던 것 같은데 나를 보고서는 놀리더라. 한달에 출연작 4편(<광해, 왕이 된 남자> <내가 살인범이다> <음치클리닉> <26년>)을 극장에 한꺼번에 거는 배우는 이제껏 없었다면서. 나도 비슷한 시기에 다 개봉할 줄은 몰랐다. 뿌듯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상반된 감정이 교차하더라.
-가족들도 4편을 다 못 봤을 것 같다. (웃음) =안사람은 당신 대단하다고 하는데. 애(개그우먼 장윤희)는 별말이 없더라. 개그 아이디어 짜느라고 매일 새벽에 들어오니까 영화를 다 보지도 못했을 거다. 그냥 “잘했어요?” 하는 거지.
-<26년>은 관객수 200만명을 돌파하면서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이젠 한숨 돌려도 되겠다. =사실 언론시사회 때 봤을 때는 껄끄럽고 덜그럭거리는 부분들이 보여서 걱정을 좀 했다. 그런데 나흘 정도 지나 열린 VIP 시사회에서 다시 봤는데 깜짝 놀랐다. 조근현 감독님이 언론시사 끝난 뒤 편집과 음악을 좀 다듬는다고 했는데 그렇게 달라질 줄이야. 어디를 고친 거지 그랬다. (웃음) 연결이 매끄러워졌고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리드미컬하게 표현됐더라. 영화가 전체적으로 정립이 됐다고 해야 하나.
-캐스팅 제안을 즉시 받아들였다고 들었다. =SBS 드라마 <삼김시대>에서 전두환 역을 맡은 적 있다. 그런데 호응을 얻지 못해서 56부작으로 기획했던 드라마가 26부작으로 끝났다. 제대로 평가를 못 받고 사장되는 바람에 마음이 별로 좋지 않았다. TV에서 그렇게 큰 배역을 맡은 적이 처음이었으니까. 방영 분량 중 절반 정도 나왔는데 대통령이 돼서 사복도 입고 그럴 참에 드라마가 끝이 났다. ‘아, 이제 닮아가는구나’ 하는 찰나에 막을 내린 거지. 이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이덕화씨가 그 역할을 하는 걸 보고서는 ‘아, 나는 끝났구나’ 하고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 그랬다가 한참 지나 <26년>의 ‘그 사람’ 역할을 제안받은 거다. 안 하겠다고 할 수 있겠나. 10여년 전의 아쉬움이 다시 한번 평가받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삼김시대>의 전두환과 <26년>의 ‘그 사람’은 동일한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지만 배우 입장에서 캐릭터에 접근하는 방법은 사뭇 달랐을 것 같다. 이를테면 <삼김시대>의 전두환은 과거 인물이고, <26년>의 ‘그 사람’은 현재의 인물이다. =일단 내가 ‘그 사람’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들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면 캐릭터 표현이 전혀 안된다고 봤다. 모든 상황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애썼다. 극중 대사처럼 ‘그 사람’은 5.18 당시 학살에 대해 군인들의 자위권 발동이라고 확신한다. 수도 없이 그렇게 말했는데 왜 아직까지 못 알아듣고 이러느냐, 이 답답한 사람들아, 하는 거지. ‘그 사람’ 입장에선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가 분명 있는 거다. 그걸 끝까지 밀어붙여야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들의 분노의 감정들이 살아날 거라고 봤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기 위해선 최소한의 공감이 필요했을 텐데. =내 나이대 사람들이 보기에 ‘그 사람’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통령직을 그만뒀는데도 몇 십년 동안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있지 않나. 그게 개인적인 카리스마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들의 뒤를 오랫동안 봐줘서였을 수도 있다. 드라마를 할 때만 해도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이번에 보니까 경상도 사투리지만 대구다, 부산이다 하는 전형적인 사투리는 아니다. 툭툭 한마디 던질 때마다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는데, 실제 대사를 할 때에도 그런 쪽에 주안점을 뒀다.
-‘그 사람’의 어록을 달달 외울 정도였다고 하더라. 사전에 자료조사를 하면서 몰랐던 점을 발견한 게 있나. =전에 봤던 자료들을 다시 훑어보는데, 11대 대통령 취임식과 12대 대통령 취임식의 연설 톤이 달라졌다는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더라. 불과 1년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11대 때는 하이 톤의 격앙된 분위기였다면 12대 때는 목소리도 좀 깔려 있고 표정도 여유로워 보인다.
-서로 다른 연설 톤이 감정의 수위를 조절하는 기준점이 됐을 것 같다. =<26년>의 ‘그 사람’은 대사를 할 때 어떤 상대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목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해야 한다. 차이가 나는 두 연설의 톤을 생각하면서 연기했다.
-우리가 모르는 ‘그 사람’의 버릇도 있을 텐데. =담배 피우는 모습이 특이했다. 다섯 손가락을 다 펴고 피우더라. 처음 봤을 때는 세련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다시 보니까 군인 같아 보여서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찍을 때 그렇게 했다. 침이 마르면 말하기 전에 뻑 하고 입술을 붙였다가 다시 떼는 버릇도 있다. 그때 입 모양이 U자형으로 변하는데 그런 표정까지 세밀하게 묘사하려고 했다. 내적 표현이 가능하려면 외적 모사가 그전에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순간의 찡그림 같은 표정들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후반부에 시체를 발로 툭툭 걷어내는 동작들도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를 단박에 보여준다. =현장에서 즉석으로 상의를 해서 인물들을 더 살리기 위한 제스처를 많이 만들어 넣었다. 대사도 마찬가지다. 조근현 감독님은 시나리오대로 찍는 틀에 박힌 스타일은 아니다. 일단 감정을 모두 쏟아서 연기한 다음에 그걸 놓고서 가감하고 추가하고 하는 식이다. 진배(진구)한테 발로 채이는 장면에서 처음엔 절로 비명이 ‘으아’ 하고 나왔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 사람’ 같으면 ‘흑’ 정도가 맞을 것 같아서 다시 찍기도 했다.
-격한 액션을 선보인 건 처음이다. =굉장히 긴장했다. 얼마나 맞아야 하는 거지 그랬다. 스탭들이 보호대를 옷 안에 넣어주는데 너무 많이 끼워줘서 이상하더라. 액션장면에선 타격하는 순간 컷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런데 촬영 들어가니까 정말 패더라니까.
-나중엔 자진해서 아대를 모두 빼냈다던데. =다 뺀 건 아니고 좀 빼자고 했다. 보호대가 너무 두툼해서 모양새가 너무 아니었다. 몰입해서 한번에 가야 했고. 그런데 한대 맞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스탭들이 안 그래도 미리 그런 말을 해주었다. 보호대 빼면 뺀 자리만 맞는다고. (웃음) 목 졸리는 장면에서도 진배가 찬 수갑이 목젖에 닿아서 너무 아팠다. 촬영 끝나고 나서 이틀 정도 몸살을 앓았다.
-배우 장광에게 1980년대는 어떤 시대였나. =성우를 하고 있을 때다. 1978년에 동아방송에 입사했는데 사무실이 광화문 사거리에 있었다. 80년 봄에 데모하던 대학생들이 하이바 쓰고 청윗도리 입은 애들한테 잡혀가는 걸 매일 봤다. 계엄령이 선포된 뒤에는 방송 대본도 매일 시청에 가서 검열도장을 받아온 뒤에 읽어야 했다. 술집에 가서도 함부로 정치 이야기를 못하던 서슬 퍼런 시절이었다.
-촬영장에선 선배님이나 선생님으로 불렸나. 아니면 ‘그 사람’으로 불렸나. =(웃음) 촬영할 때는 선생님, 선배님이라고 했지. 이경영씨가 장난을 잘하는 편이라서 무대인사 가면 그런다. ‘사과해!’ 나라도 사과해야지 어떻게 하겠나.
-영화 연기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다고 여러 번 토로했는데. =<음치클리닉>의 공사장은 개인적으론 아쉬운 게 많다. 코미디영화인데 웃음 포인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대사가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럴 여지가 애초에 별로 없긴 했지만. <내가 살인범이다>는 <도가니> 끝내고 곧바로 찍은 영화라서 시선이나 타이밍이 어색한 부분들이 두어 군데 보이더라. 내 연기가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해서 좀더 공부가 필요하다.
-수염을 기르고 있는데.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촬영 중이다. 빈민촌에 들어온 고정간첩들에게 월세를 받고 사는 영감 역할이다. 연기를 계속하려면 체력부터 키워야 할 것 같다. 술도 좀 줄여야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