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은 한 세기 동안 수십 차례 영화와 드라마로 옮겨졌다. 비교적 최근 버전으로는 리암 니슨이 장발장으로 분한 빌 어거스트 감독의 영화(1998)와 제라르 드파르디외, 존 말코비치가 출연한 TV드라마(2000)가 있고, 클로드 를르슈 감독의 1995년 버전처럼 원작의 설정을 새로운 이야기에 덧댄 영화도 있었다. 여러 각색물 중에서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아마도 뮤지컬 버전일 것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지난 30여년 동안 꾸준히 무대에 오르며 인기몰이를 해왔다.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레미제라블>은 이 뮤지컬을 다시 한번 영화적 형식으로 재연한 작품이다. 1985년 런던 초연 이후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지휘해온 프로듀서 카메론 매킨토시와 워킹타이틀사, <킹스 스피치>의 톰 후퍼 감독이 의기투합했고, 그 결과 거의 전 대사가 노래로 된 실제 공연 형식을 고스란히 살린 작품이 만들어졌다.
영화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40여곡의 노래는 촬영현장에서 직접 라이브로 녹음되었다. 덕분에 배우들은 스튜디오에서 미리 녹음한 노래와 촬영 당시의 연기가 어긋날까 불안해하지 않고 캐릭터의 감정에 집 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같은 정공법은 순간의 감정이 노래에 스며들어 화면에 리얼리티를 더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있는 선택으로 보인다. 게다가 노래를 부르는 배우의 얼굴을 카메라가 정면으로, 그것도 가까이서 잡을 때가 많기 때문에 무대 먼발치에서는 놓치기 쉬웠던 감정의 섬세한 결들이 그대로 화면에 담기기도 한다. 라이브 녹음과 클로즈업이 만들어낸 시너지 효과는 판틴 역의 앤 해서웨이가 <나는 꿈을 꾸었네>(I dreamed a dream)를 부르는 대목처럼 멜로디와 감정의 추이가 긴밀히 연계되는 극적인 장면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반면, 상대적으로 밋밋한 멜로디의 노래가 나올 때에는 타이트한 숏이 반복되는 촬영 패턴이 지루하게 느껴진다. 뮤지컬을 영화화했을 때 촬영과 편집으로 확장되는 시각적 스펙트럼 측면에서, 톰 후퍼의 <레미제라블>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단선적인 숏의 배치로 인해 무대 공간과 조명이 선사하는 복합적인 여운이 반감되고, 여러 인물들이 소동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뮤지컬 관객이 갖는 선택적인 관람 기회가 현저히 줄어드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뮤지컬의 현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이미지를 통해서 무대의 한계를 자유로이 뛰어넘는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배우들의 연기에도 부분적으로 아쉬움이 든다. 러셀 크로의 자벨은 장발장을 압박하기 훨씬 전부터 서둘러 우수에 차 있는 듯한 느낌이고, 아만다 시프리드의 코제트는 뮤지컬의 비중을 고려하더라도 존재감이 미미하며, 테나르디에 부부로 분한 사샤 바론 코언과 헬레나 본햄 카터의 감초 악역 연기도 이렇다 할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그러나 이같은 단점들이 약동하는 민중의 에너지에 대한 위고의 성찰마저 흐리는 것은 아니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이나 복역해야 했던 장발장, 평생을 추격자의 삶을 살았지만 스스로에게 결박되어 있었던 자벨, 가련한 판틴과 그녀의 딸 코제트 등 주요 등장인물들은 물론이고, 19세기 프랑스의 후미진 골목에서 한데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 나은 내일을 꿈꾸었던 청년 혁명가들이 보여주는 인간애와 자유의지가 이번 영화를 통해서도 간명한 감동을 남기기 때문이다. 거대한 바리케이드 위에서 군중이 함께 부르는 노래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를 담은 영화의 엔딩은 이 묵직한 서사시의 커튼콜로 손색이 없다. 가난과 무지가 존재하는 한 혁명의지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존재할 것임을 예감한 위고의 비전을 고려한다면, 멜로디 속에 인간에 대한 뜨거운 연민을 담아낸 뮤지컬과 영화의 해석이 더욱 적절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