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 익숙하다. 어느 순간부터 스크린의 단골손님이 되더니 이제는 화면에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 섭섭할 지경이다. 무시무시한 악역부터 친근한 옆집 친구까지 천의 얼굴을 소화하면서도 전혀 위화감이 없는 배우 김성오. <아저씨>의 장기밀매업자 종석과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김 비서가 한 얼굴 속에 자리할 수 있는 건 만만치 않은 그의 연기 내공 덕분이다. 2000년 연극 <첫사랑>으로 데뷔해 수많은 영화 속 단역을 거치고, 서른두살에 SBS 공채 탤런트에 늦깎이 합격하여 오늘날 충무로의 대세가 될 때까지. 숱한 풍파에도 그를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오로지 연기를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 그것뿐이다.
-12월에만 <나의 PS 파트너> <반창꼬> <타워>가 연달아 개봉한다. 그야말로 대세다. =그렇지도 않다. 엄밀히 말하면 오히려 운이 없는 편이다. 한꺼번에 개봉하는 통에 순식간에 작업한 줄 아는 분도 계신데, 우연히 개봉 시기가 겹친 것뿐이다. <타워>는 촬영한 지 벌써 1년이 넘어 오래된 기억같이 느껴질 정도다. (웃음) 홍보 일정을 조절하기도 만만치 않은데 뭐가 더 재미있냐는 질문도 자주 받아 곤란하다. 아, 미리 말씀 드리지만 세편 모두 재미있다. (웃음)
-그럼 세편 중 뭐가 제일 힘들었나. =비교하기 곤란하다니까. (웃음) <타워>는 재난영화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힘든 장면이 많아서 온몸에 멍은 기본이고 파스를 달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술 마셨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다들 술도 좋아하고 거기서는 막내였던지라. 힘들게 촬영한 것보다는 힘들게 술을 마셨다. (웃음) 물론 그만큼 현장 분위기는 좋았다.
-<나의 PS 파트너>의 용수와 <반창꼬>의 석운은 캐릭터가 일정 부분 겹친다. =멜로와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기본적인 틀이 있으니. 일부러 다르게 표현하려 억지를 부리진 않았다. 캐릭터의 개성도 중요하지만 작품 전반의 흐름이 더 중요하다.
-이제 충무로에서 빠질 수 없는 위치를 확보한 것 같다. =주로 주인공 친구 역할이다. (웃음) 그런 흐름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아저씨>를 찍고 난 뒤에는 한동안 악역만 들어왔었다. <시크릿 가든> 이후에는 또 친근한 이미지의 역할들이 주로 들어왔고. 이번에 세편이 연달아 나오니 슬슬 다른 것을 해보고 싶기도 하다. 아예 삭발하고 나오는 강한 역할?(웃음) 예전에 연극을 할 때는 사랑이나 의리에 목숨 거는 밑바닥 인생, 과묵하고 말수가 없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아직 영화에서는 해보지 못했다. 여전히 도전하고 싶은 욕심은 있다.
-드라마의 단역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위치까지 왔는데 달라진 게 있나. =일단 좋다. 종합적인 의미에서. (웃음) 데뷔 초반에는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어떤 역할, 어떤 작품이라도 ‘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다고 그때가 나빴다는 말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그때도 나름 행복했다. 영화 오디션을 보고 촬영장에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득 채워지는 충만함 같은 게 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상황은 좋아졌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때처럼 넘칠 듯한 충만함은 없는 것 같다. 피치 못해 거절도 해야 하고 상황과 입장이 바뀌면서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고민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진 않다. 일단 지금 일이 너무 재미있고 즐겁고 감사하다. 그게 다다. 머리 복잡한 일도 많지만 작품마다 현재에 집중하고 현장을 즐기고 싶은 게 당장의 솔직한 심정이다.
-제의도 많이 들어올 텐데, 작품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재미있다, 재미없다를 우선 판단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읽을 때 맡을 캐릭터 중심으로 다시 한번 읽어본다. 가끔 시나리오는 별로지만 맡을 캐릭터가 굉장히 재미있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아쉬울지언정 선택은 잘 하지 않는다. 시나리오의 재미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연기도 즐겁고 작업도 즐겁다.
-<반창꼬>의 용수, <나의 PS 파트너>의 석운, <타워>의 인건 중 누가 실제 본인과 가장 많이 닮았나. =일단 차이라면 <반창꼬>에서는 소방관이었고 <타워>에서는 소방관의 도움을 받는 역할이었다. (웃음) 그러고 보니 <반창꼬>에서는 사랑을 받는 역할, <타워>에서는 사랑을 하는 역할, <나의 PS 파트너>는 그 중간쯤에 있었던 것 같다. 셋 다 내 모습의 일부분이고 마음에 든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니까.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좀더 편하고 자연스러웠던 건 <나의 PS 파트너>가 아닐까 싶다. <나의 PS 파트너>의 석원의 삶은 대다수 남자들의 생활과 비슷하다. 놀고 웃고 떠들고 야한 농담도 하고. 작품에서도 실제 친구와 나눴던 대사들을 차용하기도 했다. 누구나 그런 친구 한명쯤 있지않나? 상황에 따라 자기가 그런 친구가 되기도 하고. (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창꼬>의 용수와 <나의 PS 파트너>의 석운은 미묘하게 다른 지점이 있다. =용수는 처음에는 무뚝뚝하고 우직한 캐릭터였는데 찍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조금씩 수정되었다. 예를 들면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에게 “형이라고 해”라는 대사 같은 거. 친한 사람들이 농담처럼 주고받는 걸 듣고 꼭 한번 써먹고 싶었다.
-용수의 “빕스 가자”라는 대사는 정말 절묘했다. =리허설 때 대본에는 “스테이크 먹으러 가자”라고 써 있었다. 좀더 디테일하게 가고 싶어 감독님과 회의를 했는데 정말 우리나라 외식업체 이름이 한번씩은 다 나왔던 것 같다. (웃음) 그러다 ‘빕스’라는 어감이 좋아서 그걸로 했다. 상징적인 의미도 있고. 위트있는 표현에서 오는 재미들, 그런 것들이 즐겁다.
-현장에서 애드리브를 많이 하는 편인가. =일부러 준비하거나 의식하진 않는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하는데, 그래도 그리 적지는 않은 것 같다.
-로맨틱코미디에 잇달아 출연 중인데 실제 연애관은 어떤지. =남들이랑 비슷하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속 인물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실제 연애 경험을 영화에서 써먹기도 했다. <나의 PS 파트너>의 석운처럼 직설적으로 말할 때도 있고 <반창꼬>의 용수처럼 무심하지만 사소한 걸 챙겨줄 때도 있다. 이를테면 당이 떨어져 손을 떨고 있는 그녀에게 초콜릿을 사주는 것처럼. 가끔씩 자상한. 그런 부분은 용수랑 비슷한 것도 같다.
-특별히 욕심나는 역할이 있나.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은 작업 자체가 무척 즐겁고 재밌다. 그게 제일 중요하다. 물론 새로운 캐릭터를 보고 내가 저걸 이런 식으로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을 수도 있고 남들이 하지 않으려는 걸 일부러 해보고 싶은 도전의식도 있다. 이를테면 다음주부터 촬영에 들어갈 <깡철이>도 내겐 쉽지 않은 선택이다. 많은 배우들이 시나리오만 읽고 흔쾌히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기도 하고 부산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기 때문에 서울 토박이인 나로선 도전에 가까운 역할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단 즐거움이 제일 첫 번째 기준이다. 재미있을 것 같으면, 재미있으면 한다. 예전에는 100억원이 있으면 절대 여기 안 있는다는 농담도 했지만,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지금은 100억원이 있어도 여전히 연기는 할 것 같다.
-올해 초 스마트폰영화제 경쟁부문에 <와리깡>을 제작해 출품했다. 연출에도 욕심이 있나. =그건 아니고 굳이 고르라면 촬영에 욕심있다. (웃음) 뭔가를 찍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직접 콘티를 짜고 예쁜 풍경을 담는 건 정말 재미있다. (휴대폰에서 <와리깡>을 찾아 보여주며) 화면, 예쁘지 않나? 올겨울 서울에 최고 한파가 찾아왔을 때 대관령까지 가서 촬영했다. 방수팩 같은 장비를 사서 수중촬영도 하고. ‘휴대폰으로도 이렇게 찍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나름 다양한 앵글과 장면을 시도했다. 아직은 취미 수준이지만 생각은 늘 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루어질지도…. <와리깡> 때도 그랬으니까. “한번 해볼까…”가 “에라, 한번 해보지 뭐”로 바뀌는 건 그리 어렵지 않더라. 어쨌든 평생 갈 좋은 추억거리가 하나 생겨서 만족스럽다. 요즘도 심심할 때 자주 들여다본다. 그러다보면 촬영하면서 즐거웠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르고.
-20년 뒤의 모습을 그려본다면. =지금처럼 인터뷰를 하면서 영화 현장에 있었으면 좋겠다. 20년 뒤에도 이 일을 즐기고 있으면 더 행복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 짬이 나면 촬영도 간간이 하면서?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