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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과 쿠키로 어떻게 바위를 만들까
이주현 2012-12-13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최고의 오프닝 흥행성적을 거둔 <주먹왕 랄프> LA 스튜디오에 가다

<주먹왕 랄프>가 미국에서 터졌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52번째 작품인 <주먹왕 랄프>의 흥행에 힘입어 디즈니는 각국의 기자들을 LA로 초대했다. 11월6일,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발을 들였다. 프로듀서 클라크 스펜서는 스토리 보드를 보여주며 영화의 배경과 컨셉을 소개했고, 룩&라이팅 부서의 아티스트들, 비주얼개발 부서의 아티스트들은 표와 그림과 사진과 동영상 자료들을 대량으로 방출하며 구체적인 작업 과정을 공개했다. 전날 <ABC> 시사실에서 미리 본 <주먹왕 랄프>의 장면장면이 자동연상되면서 학습 효과는 극대화됐다. 스튜디오 투어는 <주먹왕 랄프>에 참여한 한국인 아티스트들과의 대화로 시작해 리치 무어 감독과의 인터뷰로 마무리됐다. 오락실 게임기 속 세계를 무대로 주먹왕 랄프가 펼쳐나가는 모험담, <주먹왕 랄프>의 매력을 찬찬히 전한다.

프로듀서 클라크 스펜서가 가우디 건축물에 영감을 받아 탄생한 <슈가 러시>의 공간을 설명하고 있다.

LA 버뱅크에 자리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찾았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미국의 차기 대통령을 뽑는 날이었다. 선거일이 휴일이 아닌 관계로 디즈니 직원들은 예외없이 출근했다. 몇몇은 가슴팍에 투표했음을 증명하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다. 커피와 빵이 상시 구비돼 있는 스튜디오 2층 라운지로 들어섰다. 2층은 <주먹왕 랄프>가 점령하고 있었다. 디즈니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2층의 한쪽을 터서 새 애니메이션 전담 공간으로 꾸민다고 한다. 아직은 <주먹왕 랄프>의 프로덕션 과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80년대에 유행한 오락실 게임기들을 통째로 옮겨와 미니 오락실을 만들어놓은 것에 한번 놀랐고, 그 게임기들이 실제로 작동한다는 데 또 한번 놀랐다. 스튜디오 안내를 맡은 마케팅 부서의 에밀리 톰슨은 “작업 기간이 길기 때문에 즐겁고, 창의적인 작업 공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리치 무어 감독을 비롯한 스탭들은 ‘사탕과 쿠키로 어떻게 바위를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주제로 하루 종일 회의를 하곤 했다. 마음껏 게임하고 사탕을 먹고 스페인으로 출장가고… 그야말로 ‘꿈의 직장’(Dream Job)이 아닌가”라고 슬쩍 회사 자랑을 덧붙였다.

이런 환경이 조성될 수 있는 건 디즈니의 에드 캣멀 사장과 존 래세터 제작총책임의 성향 때문이지 싶다. 존 래세터는 <주먹왕 랄프>에 총괄프로듀서로도 참여했는데, 존 래세터가 디즈니 아티스트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 스토리 라인이 강해야 한다. 둘째,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 셋째, 믿을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에밀리 톰슨은 “<주먹왕 랄프>에는 그런 ‘믿을 수 있는 세계’가 4개(<다고쳐 펠릭스>, <히어로즈 듀티>, <슈가 러시>, 게임 센트럴)나 있으며, 거기에 188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소개했다. 리서치는 믿을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전제조건인 셈이다. 실제로 디즈니에서 만난 아티스트들은 “현실감”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룩&라이팅 부서의 한 아티스트는 “우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의 것을 만들지 않는다. 무엇을 만들든 언제나 뿌리는 현실에 닿아 있다. 그게 영화가 현실감을 가지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주먹왕 랄프>는 한물간 오락실 게임 속 악당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애니메이션이다. 랄프는 <다고쳐 펠릭스>라는 8비트 게임에서 건물을 부수는 악당 역할을 맡고 있다. 랄프가 커다란 두 주먹으로 건물을 부수고 나면 금망치를 든 펠릭스가 부지런히 부서진 건물들을 수리한다.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펠릭스만 영웅으로 떠받든다. 악당 역할에 회의를 느낀 랄프는 결국 모두에게 사랑받는 영웅이 되고자 <다고쳐 펠릭스>를 이탈한다. 어쩌다 <히어로즈 듀티> 게임에 투입된 랄프는 칼훈 병장의 지휘 아래 사이버그(cybug) 퇴치 임무를 맡게 되고, 그곳에서 영웅의 훈장이나 다름없는 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사이버그의 습격으로 게임에서 튀어나온 랄프는 의도치 않게 카트 레이싱 게임인 <슈가 러시>에 불시착한다. <슈가 러시>에서 만난 소녀 바넬로피는 레이싱 경주에 참가하고 싶지만 프로그램 ‘오류’ 캐릭터란 이유로 경주에 출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신세다. 그러나 랄프를 만나면서(정확히는 랄프의 메달을 손에 넣으면서) 바넬로피는 레이싱 경주에 참가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처음엔 바넬로피의 이죽거리는 말투와 행동 때문에 그녀를 멀리했던 랄프는 결국 바넬로피의 진심에 동해 그녀의 레이싱 우승을 기원한다. 그러는 동안 랄프가 사라진 <다고쳐 펠릭스>는 오락실에서 영구 퇴출당할 위기에 처한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라

숲속 외딴 성은 전자음이 뿅뿅대는 게임 속 세상으로 대체됐고, 왕자와 공주가 있어야 할 자리엔 한물간 게임의 악당과 오류 캐릭터가 들어섰다. <주먹왕 랄프>는 확실히 디즈니답지 않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다. 동화와 뮤지컬 기반의 애니메이션이 아닌 데다가 모험과 도전을 감행하는 주인공들은 마이너리티들이다. 그러니까 게임 속 악당 캐릭터들의 모임 자리에선 다 큰 어른들의 한숨 소리와 푸념이 들려오고, 게임 캐릭터들의 집결지인 게임 센트럴에선 부랑자가 된 캐릭터들이 어슬렁거린다. 자신이 살던 땅에서 쫓겨난 랄프는 그곳에 들어선 아파트를 바라보며 벽돌을 이불삼아 잠을 청하기도 한다. 여기에 비장함과 웅장함은 없다. 대신 우리가 일상에서 곧잘 느끼는 씁쓸한 소외감이 있다. 마치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그래서다. 올해 개봉한 <메리다와 마법의 숲>과 비교해보면 더 재밌다. 픽사는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통해 최초로 공주 캐릭터를 선보였다. 그리고 가족의 소중함을 얘기했다. 스튜디오의 정체성을 한두편으로 판단할 순 없지만, 사람들은 픽사가 변했다고 수군거렸다. 그들이 <주먹왕 랄프>를 보면 아마도 디즈니가 변했다고 얘기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주먹왕 랄프>에는 변화의 기운이 가득하다. <주먹왕 랄프>의 프로듀서 클라크 스펜서는 말했다. “디즈니에 관한 전반적 인식이 단순히 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스튜디오라는 건데, 그 인식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일관되게 유지하고자 한 건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영화가 끝나도 관객이 캐릭터를 계속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참고로, 디즈니의 차기작은 2013년 11월 미국 개봉예정인 <프로즌>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뮤지컬 애니메이션으로, 얼음왕국에 사는 공주 자매가 주인공이다.)

<주먹왕 랄프>의 또 다른 주인공은 배경 그 이상의 배경으로 기능하는 게임 속 세계다. <주먹왕 랄프>에 등장하는 <다고쳐 펠릭스> <히어로즈 듀티> <슈가 러시>는 영화를 위해 새롭게 고안된 게임이다. 게임 속 공간은 저마다 고유의 스타일을 지니고 있다. 8비트 게임인 <다고쳐 펠릭스>의 공간은 사각형을 기본 형태로 한다. 랄프의 주먹도 네모, 댄스 플로어도 네모, 굴뚝 연기도 네모로 생겼다. 캐릭터들은 또한 스타카토로 끊어 움직인다. <히어로즈 듀티>의 세계는 폭력성과 긴장감을 강조하기 위해 삼각형을 기본 형태로 삼았다. 클라크 스펜서는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건축물에 영감을 받아 공간을 꾸몄다고 설명했다. 세 가지 게임 중 가장 현실적이고 복잡하다. <슈가 러시>는 원형을 기본 형태로 한다. 모든 것이 사탕과 쿠키로 만들어졌고, 파스텔 톤의 만화 속 세상처럼 꾸며졌다. <슈가 러시>는 비주얼개발 부서의 로렐라이 보베가 주도적으로 디자인했는데, 스페인 출신인 보베는 어린 시절 가우디의 건축물들이 사탕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에 착안, 그 아이디어를 <주먹왕 랄프>에 접목했다. <슈가 러시> 곳곳에서 가우디 건축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얘기다. 클라크 스펜서는 “마치 세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 우리의 목표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그 목표는 이미 이룬 것 같다.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소구할 거리가 더 많은 <주먹왕 랄프>는 11월2일 미국에서 개봉해, 역대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최고의 오프닝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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