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웃기는 사나이들
전국의 인상파 배우들은 다 모인 것 같았다. ‘나쁜 놈’들이 일렬로 걸어가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의 포스터는 ‘인상’적인 얼굴들만으로도 올해 상반기 극장가를 찾는 관객을 압도했다. 그 중심에는 비리로 묶인 대부와 조카, 최민식과 하정우가 있었다. ‘경주 최씨 충렬공파’ 족보를 들고 부산 일대를 돌아다니며 한탕 잡아보려는 최익현(최민식)과 조폭의 냉혹함을 지녔지만 어딘가 허술한 구석도 있는 최형배(하정우)의 모습은 80년대, 아니 2012년에도 한국 어드메에서 목격할 수 있을 법한 꼰대와 마초의 아이콘을 보여줬다. 충무로 신구 세대 카리스마 배우 1순위로 꼽는다 해도 과언이 아닌 두 사람의 만남으로, <범죄와의 전쟁> 촬영 당시 현장의 기싸움이 엄청났으리라는 일각의 짐작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현장 스틸을 보다시피 최민식과 하정우는 진짜 먼 친척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호흡이 척척 맞는 선후배 사이다. 하정우에게 최민식은 “이 작품을 선택하게 한 중요한 계기”이자 가감없이 “인생상담”을 요청하는 존경하는 어른이고, 최민식에게 하정우는 그를 “긴장하게 하는” 배우이자 능글맞은 구석 때문에 “영감님”이라 부르는 귀엽고 기특한 후배다.
섹시한 당신은 웃음보
사랑 때문에 지구 반 바퀴를 날아온 스페인 미녀를 문전박대하던 이 남자. 천하의 장성기도 영화현장에선 ‘친절한 승룡씨’였나보다. 영화에선 뺨을 때리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사랑의 격투를 벌이던 배우 류승룡과 이국의 미녀 배우가 <내 아내의 모든 것> 촬영현장에서 활짝 웃고 있다. 완벽한 아내, 그녀를 떠나려는 남편, 남편에게 고용된 희대의 카사노바가 얽힌 이 귀엽고 엉뚱한 삼각관계 얘기에 올 한해 459만명의 관객이 매료됐다. 특히 민규동 감독이 “테니스 선수의 팔뚝, 호나우두의 허벅지, 양조위의 눈썹” 등을 떠올리며 만들었다던 장성기는 과연 ‘세상 어디에도 없는 멋진 남자’였다. 류승룡의 장성기가 여성 관객의 뮤즈가 되어줬다면, 고혹적인 드레스를 입고 남편의 회사 파티에 나타나는 임수정의 연정인은 한국 모든 남자들의 환상으로 자리잡았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위너는 찌질한 남편역의 이선균이었으니, 이 어찌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말이 아니겠는가. 보고 싶은 판타지를 실컷 보여준 다음, 이것이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며 조근조근 속삭이는 이 영화는 2012년 카사노바처럼 관객의 마음을 홀렸다.
그녀, 맞나요?
<다른나라에서>
이자벨 위페르가 웃는다. 자그마한 모니터 안에서 그녀는 무얼 보고 있는 걸까. 어린아이처럼 칭얼대며 사랑을 갈구하는 영화감독? 외국 여인에게 기타 치며 노래를 불러주는 안전 요원? 아니면 한국 여자와 바람난 남편을 잊고 새 출발하려는 프랑스 여자의 모습? 그 어떤 장면이라도 그녀의 웃음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을 거다. 언젠가 이자벨 위페르가 말했듯, 사진 속 그녀는 홍상수 감독과 함께 한국의 작은 시골 마을 모항에서 흥미진진한 “모험”을 즐기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클로드 샤브롤과 미하엘 하네케의 여인을 홍상수 감독의 열세 번째 신작에서 만날 수 있다는 건 한국의 영화팬들에게 큰 희열이었다. 누군가는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나라에서>의 주인공 세 ‘안느’를 연기한 이자벨 위페르의 모습은 낯선 나라, 낯선 마을에 우연히 당도한 외국 여인 그 자체였다. 그녀는 간결하고, 자유롭고, 귀여운 이방인의 모습으로 홍상수의 세계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감독을 믿고 자신을 맡길 줄 아는 대배우와 자신의 영화세계를 보다 유연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확장해나가는 거장의 만남은 올해 5월 칸 해변에 모여든 전세계 기자들조차 매료시켰다.
감독 아니 ‘임 배우’
<돈의 맛>
‘배우 임상수’라고 부를 만하다. <돈의 맛> 제작진이 보내온 현장 비하인드컷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임상수 감독이었다. 백금옥 여사에게 목을 졸리고, 윤 회장의 짐가방을 들고, 하녀 에바 대신 윤 회장에게 야릇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임 배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칸영화제 기자간담회에서 모든 여배우들이 입을 모아 언급했던, 연기 디렉팅에 대한 임상수 감독의 열정을 알겠다. 백금옥 여사 역의 윤여정은 임상수 감독이 “연기 지도할 때 콕 집어서 설명해줘서 좋다”면서도 “섹스 신에서도 시범을 보이려고 하기에 그냥 내가 하겠다고 말렸다”는 일화를 전하기도. 더욱이 <돈의 맛>은 모두가 주인공인 영화였다. 돈을 무기로 신처럼 군림하는 자, 돈이 주는 ‘모욕’에 진절머리가 난 자, 점점 ‘돈의 맛’에 중독되어가는 자, 돈과 권력을 가진 이의 역할을 고민하는 자. 이들이 동등한 에너지를 지닌 채 맞물려야만 이 영화가 폭로하고자 하는 자본의 추한 모습이 비로소 드러날 수 있었다. 그러니 임상수 감독의 배우 디렉팅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할 수밖에. 한편 <돈의 맛>은 국내 개봉 당시 임상수 감독의 전작을 통틀어 인간에 대한 가장 따뜻한 시선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