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갑을 떠는 싸이는 능청스러운 캐릭터이자 영민한 뮤지션이다. 둘 다 그다. 최신곡 <강남 스타일>에서 그의 쌈마이 기질은 역시나 ‘발광’한다. 싸이의 이런 일관됨에 버금갈 만한 분이 또 한분 계시니, 범생이 기질로는 이분을 따라갈 이가 없을 것 같다. TV 예능 프로에 출연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은 최근 낸 책의 내용을 요점 정리했다. 대권을 향한 질문에 “일단 제 생각을 먼저 밝히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판단하겠다”며 ‘숨은 의도’가 없음을 역설했다. 말의 내용보다 입가를 바르르 떨며 애써 설명하는 모습을 보니 진짜 시험대에 올라선 이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반듯한 그의 생각은 어느 정도 알겠으나, 우리가 인간성 좋고 생각 반듯한 사람을 뽑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유권자 역시 시험대에 올라선 셈이다.
근데 따져보면 생각 반듯하고 인간성 좋은 것이 언제부터 리더의 자질에서 후순위가 됐지? 특히 정치적 리더십의 덕목을 논할 때 오히려 밀리는 항목이 됐을까? 25년 산업화, 25년 민주화 압축 성장의 그늘인가. 사람들에게 ‘생각’을 하게 하는 게 어쩌면 안철수의 스타일이자 리더십일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정치의 영역에서 우리는 ‘편들기’ 외에는 다른 적극적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I may be wrong. 안 원장의 이 한마디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 오래 정치판을 주물러왔다. 그 영향은 산지사방 온갖 행정/공적 행위에도 미쳤다. 도처에서 ‘틀림없는’ 일처리들이 사람을 잡는다. 밀양의 한 노인이 송전탑 건설에 반대해 분신 자결한 땅에 한전은 공사를 강행하고 있다. 그 노인의 칠순 동생이 구순 노모를 업고 거기서 죽겠다는데도 막무가내다. 월소득 50만원도 되지 않을 노인들에게 10억원의 손배소송과 재산가압류 신청을 하고, 철탑 부지에 벌목된 나무를 치웠다고 절도 혐의까지 씌웠다. 올해 말까지 기어이 송전선로를 완공하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송전탑의 위치라니, 지도 놓고 편의대로 콕콕 찍은 자리다. 지주의 동의가 없어도 강제수용할 수 있다는 법규와 공권력의 비호 덕분이다.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그저 지금처럼 살게 해달라는 노인들의 절규를 이렇게까지 무시해도 되는 걸까. 최소한의 ‘상식’과 ‘염치’를 잃어버린 법과 행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연일 폭염이다. 농사일하다 숨진 노인들 소식에 특히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