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와인을 마신다. 좋아하지 않아서다. 그래야 좀 적게 마시니까. 나날이 알코올 민감도가 높아지는 내 몸이 나는 나쁘지 않다. 살살 달래며 잘 살고 있다. 만성두드러기를 달래려 항히스타민제를 주기적으로 복용하거나 발톱무좀을 잡으려고 수개월간 새 발톱 만들어내는 약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럴 나이가 된 것이다. 필요한 만큼 벌고 버는(주는) 만큼 일하는 ‘노동권’이 대단히 행운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이이기도 하다.
<시사IN>의 19대 국회의원 전수조사 결과 민주통합당 기대주로 첫손에 꼽힌 은수미 의원의 ‘노동 민감도’ 발언(“노동권에 대한 민감도가 높은 사회, 내 권리만이 아니라 타인과 전체의 권리에 대해서도…”)을 보면서, 이런 이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선 ‘시대’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사노맹 활동가로, 고문 피해/수감자로, 국책기관 연구자로, 정치인들의 ‘과외 선생’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자리가 바뀌었지만 스무살 이후 은 언니의 화두는 ‘노동’이었다.
평생 뼈빠지게 일하고도 상자를 주으러 다니는 이들의 생존을 어찌할 것인가. 법조차 무시하는 사내하청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젊은 안주인에게 사모님이라 부르도록 강요받고 오히려 임금을 올리지 말아달라고 해야 하는 돌봄/경비 파견 노동자들의 존엄은 어떻게 지킬 것인가. 쉼없이 일하는 이들이 의료와 교육에서 눈물 흘리지 않고 계속 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안철수 원장이 시대의 키워드로 제시한 복지/정의/평화는 인간다운 삶의 기본인 ‘노동권’에서 출발한다. 1980년대 3저 호황으로 나라 곳간이 채워지던 시기에 마땅히 자리를 잡아야 했던 ‘노동권’과 이와 나란히 가는 ‘복지’가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흐르고(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우여곡절을 거치고(나라 살림이 연거푸 거덜나고) 만신창이가 되어(상식조차 이념으로 매도되는) ‘갱생’되는 것은 안타깝지만, 부디 더 늦기 전에 ‘발광’했으면 좋겠다. 법과 제도의 빽을 지닌 한줌 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겠으나 우리는 은수미 의원의 말대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시대 교체’의 구간에 들어와 있으니까. 그 흐름을 타자. 그리하여 너도나도 만수노동, 만수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