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영웅담, 모든 로맨스의 응축
그러나 반지의 상징이라면 진 쿠퍼가 지은 상징사전을 펼쳐놓고 반지가 속해 있는 ‘ㅂ’자를 찾으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하여 이번엔 반지를 우리의 손에서 빼보자. 거기엔 사우론이라는 불타는 눈길뿐 아니라 지구상에 떠돌아다니는 모든 영웅담과 사랑이야기를 농축한 어떤 대서사의 원형이 몸을 숨기고 있다. 예를 들면 죽어가는 프로도를 안고 검은 기사의 무리에게 쫓기며 미친 듯이 질주하는 엘프 아웬의 모습에는 죽어가는 아들을 안고 말을 달리던 마왕의 전설이 겹쳐지고, 원정대의 결성과 내분은 원탁의 기사들에 버금가지 않는가? 혹 갈라드리엘의 유혹에 몸부림치는 전사들은 후세에는 사이렌의 유혹을 받는 오디세이의 전사들이 되었고, 영원히 혼자서 사느니 당신과 함께 죽음을 택하겠다며 엘프의 지위를 버리는 아웬은 ‘베를린 요정의 시’를 쓴 것은 아니던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반지의 제왕>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바로 서양의 오랜 영웅 신화일 것이다. 하루에 6번씩 먹고 버섯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60∼120cm 정도의 작은 몸집을 지닌 생물이 영웅이 된다는 것. 영웅은 그 생애를 ‘특별한 출생과 소명에의 거부’로 시작한다. 프로도는 헤라클레스나 예수가 그러하듯 조실부모하고 배긴스의 보호 아래서 자라난다. 그러나 막연히 호빗족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동경을 지니고 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겨하며 작은 몸집, 그래서 남들보다 한정된 시선을 지닌 호빗은 바로 직관과 상상이 없는 현실세계의 인간에 대한 어떤 비유처럼 들리기도 한다. 바로 프로도는 이 현실의 세계인 자신의 고향 호빗을 떠나 온갖 장애가 도사리는 다른 미지의 영토를 여행해야 한다.
그러나 모험을 떠나기를 거부하고 대신 거대한 미궁을 지은 미노스 왕처럼, 부왕의 권유에도 한사코 결혼을 뿌리치는 <아라비안 나이트>의 카마르 알차만 왕자처럼 프로도는 반지를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반지를 갈라드리엘이나 간달프 같은 자신보다 더 커보이는 누구에게 맡기려 하고 ‘왜 반지가 하필 내게 왔지?’라고 끊임없이 한탄한다. 그러나 임무를 방기할수록 사건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법.
다행스럽게도 영웅은 소명을 받아들이게 되면 더이상 혼자가 아니게 된다. 영웅에게는 길을 안내하는 까마귀나 자신을 보호하는 투명외투나 하다 못해 물을 대신 길어다주는 두꺼비라도 있게 마련이다. 프로도 역시 고향 호빗을 떠나게 되자, 자신의 길을 안내할 현자인 간달프의 도움을 받는다. 많은 경우 신화에서 초자연적인 조력자는 난쟁이, 마법사, 은자, 목동, 혹은 대장장이거나 나룻배의 사공의 모습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서 이러한 안내자는 헤르메스 머큐리이고 이집트에서는 토트이며 기독교에서는 성령의 이름을 받는다. 그러므로 반지의 원정대는 사실상 영웅의 출발과 시련을 다루었고, 이제부터 반지의 삼부작은 이 영웅이 다시 고향에 귀환하여 자신의 지혜를 세상에 나누어주기까지의 고된 여정과 모험이 펼쳐질 것이다.
그 와중에 프로도는 몇번이나 요나가 고래의 뱃속에 들어가듯, 오디세이가 사이렌의 유혹에 이끌려 난파당하듯, 많은 유혹과 시련의 관문을 그리고 온갖 괴물을 상대하리라. 예를 들면 모도르의 땅굴 속에서 암흑과 화염에 휩싸인 발로그라는 괴물을 만나게 될 때, 간달프는 이 땅굴을 기억이 없는 곳이라고 하며, 그곳은 실제로 무덤이었다. 이 무의식의 동굴에서 오크와 발로그는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광기와 미혹과 의심과 같은 모든 부정적인 요소의 결정체로 영웅을 습격한다. 프로도 역시 종국에는 모든 괴물 중의 괴물 그리고 모든 악의 으뜸인 사우론과 맞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영웅은 마침내 이러한 도도한 어려움과 임무에 직면하여서 이제까지의 삶을 포기한다. 상징적인 죽음을 통해 자신을 환골탈태하게 되는 것이다. 나비가 고치에서 날개를 뽑아올리듯 악마의 칼에 맞아 죽음을 맞이했던 프로도가 엘프 아웬의 도움으로 다시 부활하듯, 이윽고 프로도는 죽음을 거치며 가장 귀중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것은 절대반지를 얻으면 혼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이러한 프로도의 깨달음이야말로 이제 영웅이 비로소 영웅다운 면모를 갖추었음을 만방에 알리는 시작이기도 하다.
자아 완성의 여정
결국 <반지의 제왕>이 재현하는 영웅의 신화 속에는 인간이 무지의 과정을 거쳐 서서히 자신의 무의식과 대결하고 이에 대한 극복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해 나아가는 영원불멸의 어떤 모험담이 숨어 있다. 톨킨은 많은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쉽게 부패하는가?’라는 대사 속에 반지에 대한 욕망 즉 절대 권력에 대한 추구는 인간을 불행의 나락으로 치닫게 하는 지름길임을 가르쳐준다. 반지의 주인이 되려는 자는 필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늪에 빠진다. 흥미롭게도 사우론은 단시 시선, 혹은 불타오르는 눈으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무한대의 전지전능의 추구는 불가에서 이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세겹의 지옥 불과 동일한 메타포를 이룬다. 그러므로 악에 빠진 지혜란 광기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피터 잭슨은 현명하게도 <반지의 제왕>을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랄지 <해리 포터>류의 교훈 만발한 재미난 동화라는 먹기 좋은 당의정을 덧씌우지 않는다.
오히려 사루만과 사우론의 극단의 광기는 피터 잭슨의 손에 의해 그대로 무한대의 상승과 하강을 되풀이하는 카메라의 시각으로 팽창된다. 바로 이러한 시각적 아찔함이 톨킨의 문자가 줄 수 없는 롤러코스터적인 쾌락과 두려움을 함께 실어 반지의 의미를 증폭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함은 물론이다. 그러니까 <반지의 제왕>은 튼실한 상대성 원리에 의해 지어진 성이라고 보면 된다. 반지를 사이에 둔 빌보 배긴스와 간달프의 승강이처럼 조금 큰 사람과 조금 더 작은 사람의 세상, 9명의 기사와 9개의 반지라는 10을 채우지 못한 불완전함의 세상인 것이다. 그리고 기를 벗어나게 될 때, 이윽고 <반지의 제왕>에는 무한히 솟아오르고 파헤쳐진 무시무시한 지하 동굴과 현기증나는 바벨탑이 입을 벌린다.
수직 상승과 하강을 되풀이하는 사루만의 소굴과는 반대로 평야에서 험준한 산악지대로 나아가는 반지 원정대의 카메라는 헬리콥터의 시각에서 서서히 원을 돌 뿐이다. 아주 작고 미미한 인간의 왜소함과 그러나 그것이 합쳐서 무엇인가를 이루어나갈 때 보여주는 장대한 운명의 순환고리는 바로 장대한 원형을 그리는 카메라 증폭된 무한 반지의 반원으로 거듭 태어난다.
그러니, 다시 한번 반지여 오라
그리하여 간달프는 “반지가 왜 하필 나에게 온 거죠?”라고 되묻는 프로도에게 “생과 사를 결정하는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고 주어진 순간을 어떻게 살지 결정하라”는 충고를 남기고 터미네이터와 리플리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나락 무한의 불속으로 살신성인할 때, 어찌 보면 간달프의 충언은 반지는 단지 자아를 일깨우는 개인적 신화뿐 아니라 현재와 과거를 잇는 금언이 되어간다.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완성하던 1940∼50년대는 이차대전의 참혹한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 다시 냉전이라는 국가간의 암투가 사람들의 목을 죄어가던 시기였다. 그는 무자비한 파시즘의 시대를 거쳐 다가올 폭력의 시대를 예견하고 그에 관한 개인적·사회적 금언을 반지의 표면 위에 새겨논 셈이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자기인식이란 지혜로 가는 왕도이고 가녀린 생명의 힘들을 합치는 것보다 더 큰 승리를 이끌 힘은 없다는 것. 영웅 프로도의 입을 통해 나온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렇게 하여 반지에 영롱하게 반사되어 새로운 판타지의 사회학이 된다.
그러니 다시 한번 반지여 오라. 이 모든 정신적인 것이 풍화되어가는 시대에 기꺼이 다시 한번 나의 밑바닥을 사우론의 광기와 간달프의 현명함과 프로도의 소명의식으로 채워다오. 반지의 봉인을 뜯는 것은 영화 안에 자신의 소우주를 창조하는 2000년대의 <스타워즈>를 몸소 영접하는 것, 반지의 원정대의 모험은 테러의 위협이 우리 모두의 밑바닥을 좀먹는 시대에도 계속 전진한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kss1966@unitel.net▶ 신화론으로 본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 (1)
▶ 신화론으로 본 <반지의 제왕 : 반지 원정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