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최강자를 가리기 위한 축제의 장이 열렸다. 좋은 것을 한자리에 모아두고 한꺼번에 즐기고 싶은 건 인지상정, 2006년부터 그 막을 연 애니충격전은 세계 최고의 월례 애니메이션 영화제로 애니메이션의 동향과 변화, 그리고 수준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최적의 기회를 제공해왔다. 그중 연말에 개최되는 최강애니전은 이름 그대로 올해 개봉한 최고의 애니메이션들을 모아 최고 중의 최고, 애니메이션 왕중왕을 가리는 애니메이션들의 진정한 진검승부다. 세계 4대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인 안시(프랑스), 히로시마(일본), 오타와(캐나다), 자그레브(크로아티아)는 물론 시카프(한국), 아니마문디(브라질), 홀란드(네덜란드), 슈투트가르트(독일), 애니페스트(체코), 멜버른(호주)의 세계 10대 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의 최신 수상작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최고의 잔칫상이 펼쳐진다. 이 한번의 기회로 올해 애니메이션의 모든 것을 맛볼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시와 서울시 중소기업 및 문화콘텐츠 전문 지원기관인 서울산업통상진흥원(SBA) 주최로 11월28일부터 12월2일까지 닷새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내 서울애니시네마에서 개최되는 ‘2012 최강애니전’에서는 총 33개국에서 모인 128편의 장•단편 경쟁부문 작품과 79편의 비경쟁 초청작들이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애니메이션 마니아라면, 아니 마니아가 아니라도 몇편만 관람하고 나면 절로 마니아가 될 것이다.
최강애니전의 남다른 점은 쟁쟁한 작품들만큼이나 다채로운 행사와 풍성한 프로그램에 있다. 연령별로 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최강패밀리, 청소년의 상상력을 키워줄 최강임팩트, 성인 관객 대상의 최강마니아, 그리고 최강장편으로 나뉜 경쟁부문은 물론이거니와 관객과 호흡하는 축제의 장을 만들고자 하는 만큼 비경쟁부문은 더욱 풍성하다. 필 멀로이, 야마무라 고지, 베라 노이바우어가 직접 방한하는 최강감독열전은 그야말로 최강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보기 드문 기회다. 최강아시아에서는 중국 상하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거장 3인방과 함께 중국 신세대 애니메이션 감독들의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또한 아시아 최고의 디지털 콘텐츠 어워드인 TBS 디지콘6의 올해 수상작도 상영될 예정이다. 그외에도 떠오르는 CG 스튜디오 중 하나인 ‘샤이더선’의 스탠리 시걸, <엘리뇨의 비밀>을 출품한 피터팬픽쳐스의 조성열 대표와 지난해 애니최강전 수상자이자 이스라엘의 대표 감독인 유발 네이슨, 프랑스의 레오 베리어와 보 메손도 한국을 방문한다. 실로 풍성한 잔칫집이다. 여기 실린 작품들은 맛보기에 불과하다. 자세한 작품 목록은 www.animpact.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저 와서, 보고, 즐기시라.
최강패밀리
<베토벤의 가발> Beethoven’s Wig 알렉스 홀리, 데니 실버손 / 캐나다 / 2012년 / 2분15초 / 2D, 3D ‘베토벤의 가발’이라는 퍼포먼스팀의 시리즈 주제곡을 애니메이션화한 작품. 네번이나 그래미상 후보에 오른 <베토벤의 가발>의 기발한 가사와 재치가 고스란히 화면에 담겨 있다. 가발로 인해 삶이 꼬여가는 주인공에게 가발은 고통이자 인생의 일부분이다. 자유로운 상상력이 말 그대로 실현되는 순간을 목격하는 즐거움이 있다. 음악에 맞춘 절묘한 연출과 애니메이션 특유의 표현력이 일품이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 Una Furtiva Lagrima 카를로 보겔레 / 룩셈부르크 / 2011년 / 3분8초 / 픽셀 수산시장에서 프라이팬까지 생선의 마지막 여정을 담아냈다. 얼핏 생선 CF 같은 영상 밑으로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웅장하게 깔린다. 생선들이 직접 부르는 생선을 위한 진혼곡이 스톱모션 영상과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이 작품은 생선의 입장에서 뒤집어 생각해본 전복적인 상상력을 만끽할 수 있다. 2012 멜버른 단편부문 관객상, 2012 안시 단편부문 카날플뤼 크리에이티브 에이드상 수상작.
최강임팩트
<폐기물 처리장> Junkyard 히스코 헐싱 / 네덜란드, 벨기에 / 2012년 / 18분 어둡고 음울하지만 그럴수록 눈 돌리기 힘든 마력을 발휘한다. 오타와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단편 그랑프리 수상작인 이 작품은 밑바닥 인생의 굴곡진 삶을 찰나에 표현하고 있다. 한 남자가 지하철에서 강도에게 칼을 맞는다. 죽음 직전 그 남자가 본 것은 어린 시절의 기억. 그곳에서 그는 한때 자신의 친구였던 어린 시절의 강도와 재회한다. 길지 않은 시간임에도 두 남자의 뒤엉킨 사연을 효과적으로 담아냈다. 수채화풍의 작화가 주는 깊이있는 따뜻함과 밑바닥 인생에 관한 어두운 이야기가 일으키는 화학반응이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작품.
<바보!!> Baka!! 임마누엘 와그너 / 스위스 / 2011년 / 7분30초 / 2D, 3D 선의 움직임, 은유와 상징이라는 애니메이션의 원초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 애니메이션이기에 표현 가능한 단순 미학을 통해 애니메이션이 왜 애니메이션이어야만 하는지를 보여준다. 못생기고 코만 달려 있는 친구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진 외로운 친구. 모자라고 바보 같은 그들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위로이자 버팀목이 될 수 있다. 배경조차 없는 단순하고 절제된 그림과 달리 우정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사회의 소수자 문제까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중층적인 텍스트다.
최강마니아
<프리머스 MV ‘리 밴 클리프’> Primus ‘Lee Van Cleef’ 크리스 스미스 / 미국 / 2012년 / 3분25초 / 2D, 3D / 컷아웃 플래시 2012 오타와 커미션드 부문 그랑프리 수상작. <석양의 무법자>의 악당, 서부극 악당의 아이콘 리 밴 클리프가 좀비가 되어 돌아왔다. 매번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리 밴 클리프였지만 이번만은 다르다. 팔이 떨어지고 눈알이 빠지고 다리가 잘려나가도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이 카리스마 넘치는 악당은 결국 30년 만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승리한다. 서부극과 B급 좀비영화가 유쾌한 형태로 결합한 전복적인 상상력이 빛나는 애니메이션.
<이상한 나라의 바비> Bobby Yeah 로버트 모건 / 영국 / 2012년 / 23분 / 퍼펫 2012 자그레브, 런던, 클레르몽 페랑, 토론토, 멜버른 등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수상으로 화제를 낳은 작품. 그로테스크하지만 눈 돌리기 힘든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소란을 피우면서 스스로를 달래는 폭력배 바비는 어느 날 위험한 남자의 애완동물을 훔치고 그로 인해 위기에 빠진다. 쉽게 따라가기 힘든 기괴한 질감과 표현력은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표현과 상상력의 한 극단을 선보인다. 그림이 곧 메시지가 되는 성인 버전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아니 바비.
최강장편
<리얼 로빈슨 크루소, 셀커크> Selkirk, The Real Robinson Cruso 월터 투르니에 /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 2012년 / 80분 / 3D, 스톱모션 셀커크는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항해장이다. 보물을 찾아 남쪽 바다로 향한 에스페란자에 몸을 실은 그는 선원들과 도박을 벌이다 가진 돈과 보수까지 모두 잃고 난동을 피운다. 선장 블록은 그런 그를 징계하기 위해 무인도에 버리고, 홀로 남겨진 셀커크는 실의에 빠지지만 그도 잠시, 무인도에서의 평화로운 생활은 그를 완전히 바꿔놓는다.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바다사나이들의 모험도 볼만하지만 섬에서 자급자족 생활을 하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통해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2012 아니마문디 장편부문 관객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의 강자인 남미 애니메이션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이색적이고도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노인들> Wrinkles 이그나치오 페레라스 / 스페인 / 2011년 / 89분 / 2D 2012 안시 장편부문 우수상, 아니마문디 장편부문 1등 관객상, 슈투트가르트 애니무비 최우수장편상, 오타와 장편부문 그랑프리에 빛나는 아름답고 따뜻한 애니메이션. 파코 로카의 동명 타이틀 작품을 바탕으로 한 이 애니메이션은 제목 그대로 노년의 삶(원제 ‘Wrinkles’)에 대한 애잔하고도 흐뭇한 응시가 돋보인다. 나이가 들어 요양원에 들어간 미구엘은 알츠하이머 초기 환자인 탓에 요양원의 격리시설로 끌려가게 될까 두려워한다. 에밀리오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은 그가 끌려가는 것을 막고자 함께 계획을 짜 도움을 주고 이는 단조롭고 지루한 요양원 생활에 활력이 된다. 세월의 서글픔을 재치와 유머로 풀어낸 수작. 2D로 그려진 화면의 질감도 작품에 온기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