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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용서받아도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다
손아람(소설가) 2012-11-27

<남영동1985>를 보는 3개의 시선-손아람 소설가 <소수의견>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커트 보네거트는 사회적 층위에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징후를 내밀하게 그려내는 데 평생을 바친 미국 작가다. 독일계 미국인으로 태어나, 미군으로 2차대전에 참전했다가 독일군 포로의 입장에서 미군의 범죄적 만행을 경험한 보네거트는 가해자가 형성하는 세계관의 혼란스럽고 분열적인 성격을 누구보다 빨리 감지했다. 그의 소설은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을 논박없이 조용하고 간단하게 뒤집어낸다. “그러므로 죄는 용서받아도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다.”

정지영의 접근은 커트 보네거트의 접근과 정확히 대척점에 있다. 보네거트의 소설에서 분열하는 건 언제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인 반면, <남영동1985>에서는 피해자인 김종태가 분열하고 가해자인 이두한은 흔들리지 않는 일관된 신념을 보여준다. 이 차이는 역사적 유전자의 차이에서 올 것이다. 보네거트의 인물들은 주로 사해진 죄 혹은 종료된 역사 위에 홀로 남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남영동1985>의 인물들은 현재진행형인 역사 위에 놓여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고문에 관여하거나 방조했던 권력자들의 대부분은 처벌받지 않았고 분열의 징조인 자기 환멸을 겪을 기회조차 없었다. 보네거트가 인식한 세계사와 달리 이 땅에서는 사람이 죄보다 먼저 사해졌기 때문이다. 1997년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바로 다음날 착수한 첫 번째 업무는 각각 사형과 12년형을 선고받은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의 사면에 합의하는 것이었다. <밀양>이 포착했듯이 죄보다 사람이 먼저 사해지면 되레 피해자의 정신이 분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분열적 증세가 제대로 해소되지 못한 채로 역사화되면, ‘26년’ 넘게 묵은 증오를 폭발시키는 강박적 카타르시스의 서사마저 낳게 된다.

<남영동1985>에서 가해자는 결국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지만 피해자의 귓가에는 고문당할 때 들리던 <클레멘타인> 휘파람이 메아리친다. 하지만 가해자의 귀는 피해자가 흘리던 신음을 환청하지 않을 것이다. 가해자는 죄가 아닌 자신을 사함받기를 원할 뿐이다. 몸을 고문한 자 위에서 역사를 통째로 고문한 자들도 유사한 태도를 보여왔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고문실은 역사의 대칭붕괴가 재현되는 작은 실험실과 같다. 인혁당 사건을 두고 법원에 두개의 서로 다른 판결이 있다고 말했던 박근혜를 보라. 이는 가해의 부채를 전혀 탕감하지 않은 채 지나간 권력의 채권만을 대물림받겠다는 발상이 아닌가. 가해자의 신념은 흔들린 적이 없다. 피해자들의 세계만이 대통령 후보 지지율처럼 반으로 쪼개져 분열한다. 박정희 정권 치하 고문 피해자였던 김지하는 여성 리더십의 필요를 말한다. 여기에는 모든 여성의 사회학에 대한 관점만이 있지, 단 한명의 여성이 정치를 시작하는 순간 생물학적으로 자동승계하게 된 역사적 부채에 대한 관점이 없다. 그런데 김지하가 지지하려는 것은 모든 여성이 아니라 단 한명의 여성이다. 이 역시 치매보다는 정신분열의 징후로 읽힌다.

<남영동1985>의 기조와 전략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영화를 보려는 관객은 어마어마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이 영화는 <박하사탕>처럼 쌉싸름한 맛을 주는, 죄책감에 붕괴하는 가해자의 회고록이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다. 고문에 대한 이야기이자 고문 그 자체의 형식이다. 어떻게 이런 괴물 같은 이야기가 탄생했을까.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의 눈에 비치는 어느 누구도 ‘그때 그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이 녹듯이 쉽게 사람이 용서되는 광경만을 목격해왔을 뿐 정작 죄를 용서하고 감정의 응어리를 해소해본 사회적 기억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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