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광수 덕분에 처음으로 ‘퀴어’영화를 보았다. 동성애를 다룬 영화야 그전에도 몇편 보긴 했다. 그 영화들은 가령 <브로크백 마운틴>이나 <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처럼 동성애의 정체성과 사회의 보수성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을 다룬 것들이었다. 하지만 <라잇 온 미>는 그 무거움에서 벗어나, 두 남자 사이의 사랑을 담담한 필체로 펼쳐나간다. 이 영화에서 두 연인의 성 정체성은 적어도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동성애 예술
하지만 동성애 예술이 굳이 동성애를 ‘주제’로 담아야 하나? 굳이 동성애를 주제로 다루지 않은 동성애 예술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를 바라보는 동성애자의 시각이 담긴 예술이라고 할까? 참고로 ‘게이 미학’(gay aesthetics)이라는 말이 있다. 옥스퍼드 사전을 인용하자. “게이 미학의 역사는 동성애적 주제의 역사가 아니라, 어떻게 남성 동성애가 특정한 예술 생산 및 소비의 스타일과 연결되어왔는지의 역사다.”
내가 아는 한, 이런 의미에서 ‘게이 미학’의 시초는 1895년 남색과 성추행 혐의로 오스카 와일드를 체포했던 영국의 경찰이다. 그들은 오스카 와일드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그가 쓴 희곡과 소설까지 샅샅이 뒤져 그의 동성애적 성향을 입증하는 구절들을 찾았다고 한다. 혐의를 입증하는 데에 성공했던지, 와일드는 결국 2년형을 선고받고 레딩교도소에서 머리를 빡빡 깎은 채 2년을 복역한 뒤 영국에서 영원히 추방당한다.
예술과 성(sexuality)을 연결시키는 이론적 시도는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는 예술가들이 억압된 성욕을 예술로 우회하여 승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의 남긴 작품 속에서 얼마든지 성욕의 흔적을 읽어내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성의 미학이라면, 게이 미학은 이 일반적 범주 속의 특수한 분야가 될 것이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다빈치의 작품에서 동성애 성향을 읽어낸 바 있다.
다빈치와 독수리
이야기의 발단은 다빈치가 자신의 과학 논문에 집어넣은 짧은 구절이다.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인 것 같은데, 아직 요람에 누워 있을 때 독수리 한 마리가 내게로 내려와 꽁지로 내 입을 열고는 여러 번에 걸쳐 그 꽁지로 입술을 친 일이 있었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독수리를 모성의 상징으로, 그리고 꽁지로 입술을 치는 것을 어머니의 유두나 남성의 성기를 빠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로써 어머니와 동성애 사이의 연관이 암시된다.
다빈치는 서자로 태어나 5살 때까지 어머니와 살다가, 그 뒤로는 아버지의 집에서 새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새어머니 역시 그를 생모 못지않게 사랑했다고 한다. 여기서 형성된 어머니와의 지나친 유대로 인해 그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곧 어머니를 배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동성애 성향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빈치는 제자를 미모로 뽑았다(이 위대한 거장이 정작 이름이 알려진 화가를 한명도 배출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다빈치의 <두 성녀와 아기 예수>를 제 분석을 입증하는 증거로 제시한다. 그는 먼저 성모 마리아와 그의 어머니인 수잔나의 나이 차이가 거의 안 나는 데에 주목한다. 결국 두 성녀는 자신을 길러준 생모와 새어머니를 가리킨다. 이어서 마리아가 두른 푸른 치마의 형상이 흡사 독수리를 닮았음을 지적하는데, 그놈의 꼬리가 공교롭게도 아기 예수의 입에 닿아 있다. 물론 그의 이 자의적 해석은 미술사가들의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
남자를 사랑하는 눈으로
‘고대미술 모방론’으로 유럽에 신고전주의의 물결을 일으킨 빙켈만은 동성애자였다. 그가 고대 그리스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실은 고대 그리스에서는 동성애가 자유로웠고, 심지어 가장 지고한 사랑의 형태로까지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직 동성애가 억압을 받던 시절에 고대 그리스가 그에게 일종의 도피처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이 위대한 비평가는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나 잠시 관계를 맺은 사내에게 칼에 찔려 살해당한다.
동성애자인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제시한다. 푸코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사랑’(erotic)은 주로 남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아내에 대한 사랑은 ‘가정관리술’(oikonomia)에 속했다고 한다. 오늘날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주로 여성의 신체와 관련하여 운위되지만, 고대 그리스의 조각에서 여성의 신체는 실은 부수적 제재에 불과할 뿐, 본격적인 아름다움은 역시 남성의 신체에 있었다.
빙켈만은 고대 그리스 조각의 역사를 탄생(‘고졸양식’), 성장(‘숭고양식’), 완숙(‘우미양식’), 몰락(‘모방자 양식’)의 네 단계로 구분했다. 그가 이렇게 그리스 조각에 예리한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남자를 사랑하는 눈으로” 남성의 신체를 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가 본 그리스 조각은 이성애자가 보는 것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나로서는 그의 눈에 비친 그리스 조각상의 아름다움이 과연 어떤 것일지 가늠하기 어렵다.
‘캠프’에 관하여
‘캠프’라는 말이 있다. ‘과장된 방식으로 포즈를 취한다’는 뜻의 프랑스 구어 ‘se camper’에서 비롯된 말이란다. 1909년에 출간된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그 말을 이렇게 정의한다. “과시적, 과장된, 연극적, 여성적 혹은 동성애적, 동성애자들에 관련된, 동성애자들에게 특징적인. 명사로서 ‘캠프’적 행동 (…) 그런 행동을 하는 남자.” 후에 이 말은 노동계급에 속하는 동성애 남자들의 미적 선택 및 행동의 일반적 기술이 된다.
여기서 연상되는 것은 만 레이의 카메라 앞에서 ‘로즈 셀라비’라는 여자로 분장하여 사진을 찍은 마르셀 뒤샹이다. 로즈 셀라비(Rrose Selavy)는 ‘에로스, 그것이 삶이다’(Eros, c’est la vie)라는 불어 문장을 영어식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사진 속의 뒤샹은 과장된 몸짓으로 여성의 흉내를 낸다. 로즈 셀라비는 뒤샹의 여성적 알터 에고(alter ego)로, 후기의 몇몇 작품에 그는 이 이름으로 사인을 했다고 한다. 물론 그가 게이였던 것은 아니다.
뒤샹-만 레이의 이 사진은 훗날 여장을 한 앤디 워홀의 사진 시리즈로 이어진다. 이는 물론 이 게이 예술가가 다다의 아버지에게 보내는 오마주였다. ‘캠프’라는 말은 사진 속의 워홀처럼 ‘게이’의 정체성(gayness)을 여성성(effeminacy)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됐다. 이렇게 언어와 행동으로 여성성을 과장되게 체현하는 여성 퍼포먼스가 캠프의 특징이다. 60년대에 이르면 의미가 확대되어, 뭔가 과장되거나 과시적인 것은 모두 ‘캠프’로 불리게 된다.
문학 비평가들이 자신들의 사전에 받아들인 것은 이런 의미에서 ‘캠프’다. 그의 유명한 에세이 (<캠프에 관하여>)에서 수전 손택은 캠프를 “대중문화 시대의 댄디즘”으로 규정했다. 브러멜이나 바이런, 보들레르와 같은 과거의 댄디는 그 엘리티즘 때문에 단호히 통속성을 배척했다. 그에 반해 현대의 댄디는 통속성을 배척하지 않고 그것을 외려 즐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가령 통속문화를 예술에 끌어들인 워홀의 팝아트를 생각해보라. 워홀을 통해 ‘캠프’라는 게이의 취향이 1960년대 이후 전세계로 퍼져나갈 어떤 일반적 예술 취향을 낳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