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영화’가 붐이다. 베를린이 영화의 메카가 된 지 오래지만, 이제 베를린이 뿜어내는 아우라 자체를 소재로 삼은 영화가 심심찮게 나온다. 90년대 통일 직후 베를린을 그린 유쾌한 영화 <러시아디스코>, 현재 베를린에서 공동주택을 이루고 사는 젊은이들의 고민과 삶의 방식을 그린 <방 세개, 부엌, 목욕탕> 등 베를린 특유의 분위기를 살린 영화들의 흥행성적이 나쁘지 않다. 이 가운데 특별한 베를린영화가 개봉했다. 얀 올레 게르스터 감독의 데뷔작 <오 보이>(Oh Boy)다. 이 작품은 뮌헨, 올덴부르크, 취리히영화제 등 독일과 스위스의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주목을 끌었다. 또 11월 개봉과 동시에 베를린의 풍경을 화면에 담은 올해 최고의 영화로 비평가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는 중이다.
최악의 하루를 보내게 된 니코가 <오 보이>의 주인공이다. 그는 여자친구와 이별한 날, 이전에 저지른 음주운전 때문에 심리 테스트를 받으며 모욕을 당하고 면허증까지 빼앗긴다. 설상가상으로 커피 한잔 뽑아마시려고 현금인출을 하려니 지급기가 카드를 삼켜버린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찾아간 아버지는 아들이 2년 전 법학공부를 그만둔 사실을 알고 재정적 지원을 끊어버린다. 불운한 주인공 니코에게 허락되는 건 <율리시스>의 오디세이처럼 하루 24시간 동안 도시 곳곳을 정처없이 헤매는 것뿐이다. 그는 일거리가 별로 없어 보이는 배우 친구와 나치시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영화 촬영현장에 놀러가기도 하고, 우연히 여자 동창 율리카를 만나 그녀의 언더그라운드 퍼포먼스 무용 공연을 감상하기도 한다.
베를린의 지하철, 노면 전차(트램), 커피숍을 지나치는 주인공을 따라 카메라도 움직이지만 <오 보이>는 오히려 프랑스 누벨바그와 우디 앨런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클럽, 언더그라운드 문화, 힙스터, 비오나데(천연유산균음료), 관광객 등으로 대변되는 도시 베를린의 개성은 사색하는 낭만주의자를 위해 살짝 뒷전으로 물러난 듯한 느낌이다. 흑백 화면과 재즈음악, 주인공 니코를 연기한 톰 쉴링의 열연에서 뿜어져나오는 깊은 멜랑콜리의 정서와 달리 니코가 처한 상황의 코믹함과 경쾌한 리듬의 배경음악이 반어적이고 낯선 분위기를 자아낸다.
문화도시 베를린의 몽환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슬래커’(Slacker, 나태한 세대를 일컫는 말)의 하루를 좇는 <오 보이>는 커피로 시작해 커피로 끝맺으며 실존주의적인 물음까지 던진다. “너는 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느껴봤니? 그리고 그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할수록, 사람들이 아니라 원래 너 자신이 문제였다는 것이 더 분명해진다는 사실을 아니?” 얀 올레 게르스터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건 대도시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하릴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베를린 젊은이들의 흔들리는 초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