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언제부터 돈이 연대의 가치까지 계량하게 되었을까. 돈이 그렇게 중요하면 노동운동을 왜 할까. 생존권을 지키는 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당당하거나 비굴하거나. 30년 노동상담을 해온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대학장에게 ‘너는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공지영 작가가 책을 써서 기부한 것처럼) 4억원을 줄 수 있느냐’는 비난까지 닿은 건, 참으로 보기 힘들다. 최근 <시사IN>의 이선옥(르포작가)/하종강 인터뷰와 <한겨레> 토요판 하종강 인터뷰를 보면서 ‘<의자놀이> 스캔들’로 불린 일의 전모를 알게 됐다. 각종 매체에 공 작가 인터뷰가 실렸으나 이 일이 후일담식으로만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집필/편집 과정에서의 실수를 바로잡고 적절히 설명하면 그냥 묻혔을 일이 돌출돼버린, 사실상 사건의 발단이라 할 공 작가의 트위터 문장들을 뒤늦게 보았다. 제 감정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 청소년이 격한 마음으로 일기장에나 쓸 말들이었다. 쌍용차 사태의 전말을 다룬 <의자놀이> 집필이라는 재능기부까지 한 작가가 평생 ‘노동’을 중심으로 살아온 다른 이의 삶을 위선, 명예욕, 영웅심, 시기심 등의 단어를 써가며 매도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저 감정적 대응이었다고 하고 넘어갈 수 있는지, 골이 띵하다.
칼은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이 무게와 방향을 가늠하지 않으면 곧바로 칼춤이 된다. 대선 정국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경제민주화라는 말은 결국 재벌의 칼춤을 막자는 것이다. 동여매지 않으면 그런 괴물이 없으니까. 현대그룹 최고위 임원들이 작당한 현대증권 노조 무력화 방안에서도 그 칼춤을 본다. 이들에게 노조는 무조건 파괴 대상이다. 그래서 노조 전임자들을 회유/겁박하고, 농성하면 곧장 업무 방해 혐의로 고발하며, 다음 위원장 선거에 대비해 진 후보를 회사가 끌어들이자는 거다. 익히 보아온 시나리오다. 위원장을 개인적으로 괴롭혀 반발하면 명예훼손으로 민사소송을 걸고 사는 집에 100억원의 가압류를 걸자는 작전도 나온다. 누가누가 더 악랄하고 치졸한지 경합하는 것 같다. 쥔님 심기 헤아려 머슴 무릎 꿇리자는 마름들의 충성경쟁이다. 이에 맞서 법과 윤리에 맞게 ‘노동권’을 지키는 게 가능키나 한 일일까. 이렇게 사람을 부리는 재벌을 ‘민주화’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경제민주화라는 말이 범죄민주화라는 말처럼 아이러니하게 들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