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영화제가 세계 최고 영화제로 등극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비결은 독립성과 전문성일 것이다. 프랑스 정부건 칸 지방정부건 칸영화제에 거의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리고 집행위원장의 임기가 오래도록 보장되다 보니 전문성 또한 축적될 수 있다.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영화제의 핵심인 예술감독은 단 4명이었다. 그중에는 1947년부터 1972년까지 일한 로베르 파브르 르브레와 1977년부터 2001년까지 일한 질 자콥이 있다. 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재임하면서 칸영화제의 정체성을 확립한 인물로 꼽힌다.
눈을 한국으로 돌리면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전주국제영화제의 파행 사태만 봐도 알 수 있다. 최근 홍영주 사무처장, 조지훈•맹수진 프로그래머 등 무려 8명의 주요 스탭이 전주영화제를 떠났다. 이와 관련해 그들이 보낸 ‘전주국제영화제를 떠난 직원 8인의 사임의 변’을 보고 있자면 한국의 국제영화제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보인다. 전주영화제 사태는 고석만 신임 집행위원장과 기존 스탭들의 의견 충돌과 그것을 넘어선 여러 가지 갈등에서 비롯됐다. 영화제를 떠난 스탭들이 밝히는 두 가지 의견 충돌 지점은 고석만 위원장이 취임 직후 추진 계획을 밝힌 시네아스트 50 프로젝트와 자크 오몽 공동집행위원장 선임이다. 시네아스트 50 프로젝트는 1년 동안 매주 한명의 거장 감독을 전주로 초청해 행사를 갖는다는 것이다. 실현된다면 엄청난 일이겠지만 현재 30억원대의 전주영화제의 예산보다 많은 40억원 정도의 돈이 들어가야 한다니 스탭들로서는 난감해했을 법하다. 또 하나 충돌지점은 민병록 전임 위원장 시절 추진했던 사안으로, 세계적인 영화학자인 자크 오몽을 공동 집행위원장으로 선임해 영화제를 한 단계 발전시킨다는 내용이다. 놀랍게도 자크 오몽은 이를 승낙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석만 위원장은 이를 극력 반대해 결국 오몽을 영입하는 일은 무산됐다. 이 과정에서 고석만 위원장과 스탭들의 관계가 악화된 건 불을 보듯 뻔하다. 감정적으로 상처 입고 자존심이 상한 스탭들은 영화제에 회의를 느꼈고 결국 사퇴를 결심하게 됐다.
구체적인 모양새는 다르지만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일을 수없이 봐왔다. 전주영화제만 하더라도 창설 멤버인 김소영•정성일 프로그래머가 일찌감치 물러나야 했고, 최근 유운성 프로그래머의 사퇴까지 여러 잡음을 만들었다. 부천에서도, 제천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영화제를 자신의 홍보수단으로 여기는 자치단체장 때문인 경우도 있었고, 지역 유지들의 간섭 때문인 경우도, 집행위원장의 영화제에 대한 몰이해 때문인 경우도 있었다.
아무튼 걱정스럽다. 영화제 일이라는 게 오랜 네트워크와 꾸준히 축적된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간부급 스탭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전주영화제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새로운 부위원장과 수석 프로그래머가 선임되긴 했지만 내년 영화제가 무난히 치러질 것이라 확신하기는 어렵다. 내년 봄에도 전주를 찾게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