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리 해고로 직장을 잃었지만 꿈이 있어 행복하다’ 혹은 ‘나는 불치병에 걸려 삶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행복하다’라는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고, 강상중은 <살아야 하는 이유>에 썼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만 찾기 힘든 것은 아니다. 그런 말을 믿는 사람도 찾기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자신과 타인의 행복의 키를 재려니 언제나 객관적으로 보이는 수치라는 기준이 필요하다. 집은 몇평, 연봉은 얼마, 결혼 여부와 자녀 유무(나아가 자녀의 학업 성취도), 차종, 키와 몸무게, 집안, 배우자의 집안… 이것저것 다 있다 해도 취향이 구리면 실망.
내가 안간힘을 써서 그 기준을 맞추고 있으니 타인도 그 기준에 맞춰 살고자 마땅히 불행할 정도로 노력해야 한다. 직업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고 있다니 그러면 직업 때문에 원형탈모가 생기고 얼굴 피부가 다 뒤집어진 나는 어쩌라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줘, 내게 있는 직업이 네게 없으니 불행하다고 해줘. 눈을 번뜩이며 내게 있고 타인에게 없는 것을 찾아내는 기민함.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외롭지 않다고 하면 미래의 너는 외로워질 것이라고 하고, 아이를 낳지 않았는데 부부 사이가 연애할 때 같다고 하면 서로 집착이 심해지는 경향이 있어서 장기적인 관계에는 좋지 않다는 조언을 듣는다. <고민하는 힘>을 읽으면 행복이라는 현대의 종교(사실은 돈이라는 부적만 충분히 있으면 해결될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것)를 반복해 고민하게 된다. 강상중은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를 다시 읽으면서 다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왜 살아가는가,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특히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을 통해 돈, 사랑, 가족, 자아의 돌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절망이라는 고민거리를 끄집어내는 대목은 흥미롭다. 참고로 나쓰메 소세키가 본 가정은 무엇이었을까? “‘핵가족’이라는 말도 없던 시대에 ‘사회의 최소 단위 공동체’인 가정을 ‘사회의 최소 단위 아수라장’으로 파악한 나쓰메는 상당히 선구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민하는 힘>에서 이어지는 <속 고민하는 힘>이라는 원제를 갖고 있는 <살아야 하는 이유>는 죽음이나 불행, 슬픔이나 고통, 비참한 사건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마음껏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책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해결책으로 이어지는 책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줄 한줄 결코 쉽게 읽어넘길 수 없는 이유는 이 책의 고민이 강상중 자신과 그의 가족을 둘러싼 비극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나라로부터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두 책 사이에, 그 ‘속’이라는 한 글자가 더해지는 동안 그의 아들은 세상을 떠났고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는 대지진이 일어났다. 비명 같은 두 사건의 아득한 크레바스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묻고 답을 길어올리는 그의 질문은 고되고 절박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