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왕이 된 남자>의 성공이 당분간 제작방식의 획일화를 가져올지 아니면 도리어 다양한 제작방식을 이끌어...
최근 한국영화 관객수 상승으로 인한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우려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제작사와 투자배급사와의 관계가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2012년 4월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에서 실시한 영화산업 공정성 인식도 조사에 따르면 다른 산업 대비 영화산업의 공정성에 관한 신뢰도가 100점 만점에 평균 35점으로 현저히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낮은 점수를 받은 부분은 ‘투자배급사와 제작사의 거래관계에서의 공정성’(25.5점)과 ‘투자배급사가 투자한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의 공정성’(23.7점), 그리고 ‘자사계열이 아닌 배급사 영화 영화대우의 공정성’(21.5점)이었다.
투자배급사에 대한 이같은 뿌리 깊은 불신은 최근 흥행 성적이 좋을수록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위 보고서에 의하면 조사대상의 70.7%가 현재의 관계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응답했으며 이를 점수로 환산했을 때 평균 25점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으로 타 분야에 비해 현격히 낮은 수치다. 협의의 공정성부터 수익배분율 문제까지 문제인식의 범위도 다양하게 나타났다. 산업이 호황이어도 사라지지 않는 이러한 불신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지난 4~5년간 한국영화 제작 시스템의 급격한 변화과정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2000년 중반 한국영화의 수익률이 급전직하한 이후 제작 시스템의 구조조정은 불가피했다. 수익률은 -40%까지 떨어졌고 불황의 쓰나미는 수많은 중소 제작사들의 도산으로 이어졌다. 그간 투자배급의 역할에 충실하며 제작사들에 개발비를 지급하던 투자사들이 더이상 제작사들을 신뢰하지 못한 채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고 주요 제작사들(싸이더스, 명필름, 강제규필름, 씨네라인Ⅱ, LJ 등)은 인수합병 및 우회상장을 통해 대기업이나 금융자본 계열로 편입했다가 다시 분리되는 과정을 거쳤다. 제작사들은 수익률 상승을 위해 제작비 절감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실제로 2002년 이후 25억원 내외를 유지해오던 영화 제작비는 2009년 이후에는 15억원 내외로 급격히 축소된다. 이 시점에서 제작 과정 전반의 주도권이 자본을 보유한 투자배급사쪽으로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투자사와 제작사 수익률 배분 8 대 2까지도
문제는 위기 극복을 위해 제작 시스템 전반의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심각한 불협화음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우선 제작비 절감으로 인력 유출이 일어났다. 투자사의 지원이 끊긴 제작사들은 우선적으로 인건비 축소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경험이 많은 전문 인력들은 자연스레 유사업계로 빠져나갔다. 나우필름의 이준동 대표는 “이 시기 자본과 분리한 중견 제작사가 연이어 문을 닫거나 개점 휴업 상태에 접어들면서 경험있는 제작자들도 졸지에 실업자로 전락했다”고 밝혔다.
두 번째 문제는 제작사와 투자사 사이의 힘의 추가 심각하게 기울어졌다는 점이다. 자본 확보의 다양한 통로를 확보하지 못한 제작사 입장에서는 투자사가 원하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고 불공정하고 무리한 요구를 해오더라도 거부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실제로 최근 투자배급사가 요구하는 배급수수료가 10%에 달하며 여기에 자문료 등 각종 명목을 추가로 만들어 떼어가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말했다. 심 대표는 심지어 “작품에 거의 기여를 하지도 않고 투자를 빌미로 공동 제작자로 이름을 올려 수익을 나눠가는 형편”이라고 사정을 밝혔다.
심 대표의 말처럼 가장 심각한 변화는 그간의 실패와 경험을 바탕으로 투자배급사가 제작에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갈 곳이 없어진 제작자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인력도 확보했음은 물론이다. ‘한국영화 투자제작 유형 및 저작권 귀속 기준 연구’에 따르면 롯데엔테인먼트는 2009년 이후 선급금 형태의 기획개발비 대여를 중단하였고 쇼박스도 매우 제한된 소수의 영화에만 기획개발비를 지원하고 있다. 대신 1/3 정도는 공동 제작에 관여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선회했다는 것이다. 제작 대행 방식을 선택한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를 비롯해 상당수의 작품이 CJ나 롯데의 계열사 혹은 공동 제작이란 방식으로 제작에 관계하고 있다. 탄탄한 자본력과 배급력을 지닌 투자배급사가 직접 제작에 뛰어들 경우에 중소 제작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고지에서 출발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이를 지켜본 제작사들 입장에서는 불공정 경쟁에 대한 의심과 함께 상대적 박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최근 성공한 몇몇 한국영화의 제작 시스템에 대한 제작자들의 불만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 경우 문제는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불공정한 계약관계, 다른 하나는 제작에 대한 자본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다. 특히 제작 과정에의 직접적인 관여는 제작사의 창의력을 억압하고 영화의 다양성을 앗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심재명 대표에 따르면 “최근 투자사와 제작사의 수익률 배분이 6 대 4는커녕 7 대 3, 심지어 8 대 2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한 부당하게 제작비 부분을 전가하거나 배급수수료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등 불공정 계약에 대한 압박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제작 전 과정에서 간섭과 통제
제작 과정에 대한 간섭과 통제에서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제작사에 기획개발비를 투자하기보다 특정 작품에 직접 기획개발비를 집행하면서 동시에 공동 제작 지분을 추가하는 이른바 ‘프로젝트 기반’의 제작 유형이 증가하면서 감독은 물론 배우 캐스팅에도 직접 관여한다는 것이다. 이준동 대표는 이 과정에서 제작사를 거치지 않고 개별 제작자나 감독과 직접 계약을 맺는 일도 적지 않게 일어난다고 밝히며 “제작자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투자배급사의 지나친 간섭과 관리는 결국 영화의 질적 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안전하고 검증된 기획을 선호하는 자본의 통제하에서는 과감하고 참신한 도전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이는 곧 한국영화의 획일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심재명 대표 역시 “1천만 관객과 1억이 넘는 관객수는 대기업이 만들어낸 숫자에 불과하며 보호 장치 없는 자본으로의 통폐합은 결국 영화시장 전체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최근 한국영화의 호황은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기둥을 뽑아서 인테리어에 열중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불공정 계약관계를 개선하여 제작이라는 전문영역을 보호하지 않는 한 한국영화의 장기적인 발전은 어렵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준동 대표는 “대기업 중심의 제작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중소 제작사가 지속적으로 기획개발에 투자할 수 있도록 자본 유입의 다변화와 같은 제도적 보완이 필수적”이라고 대책을 설명했다.
반면 같은 현상을 두고 전혀 다른 해석의 목소리도 있다. <광해>의 제작 대행을 맡았던 원동연 대표에 따르면 “최근 한국영화의 흥행은 영화시장 전반, 특히 허리가 튼튼해진 고무적인 현상이며 <광해>와 같은 제작 대행 경우는 자본이 제작을 잠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작 방식과 통로의 다양화를 보여주는 긍정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제작 대행 방식이 중소 제작사가 감당하기 힘든 프리 프로덕션 작업과 그 비용을 투자배급사에서 감당하며 제작사의 부담을 줄여주는 효율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한 “그간의 불황을 경험하며 충분히 역량을 키운 투자배급사가 영화 다양성에 해를 끼칠 것이란 의견은 지나친 우려와 추측에 불과하다”며 새로운 가능성의 차원에서 접근해줄 것을 주문했다. 한발 더 나아가 원 대표는 한국영화의 질적 향상의 성과로 시장 규모도 안정적으로 확대되어가는 지금의 호기를 놓치지 말고 임금단체협상이나 각종 표준계약서와 같은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문제인식과 접근방법에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한국 영화산업의 허리이자 중심인 제작 시스템 전반에 대한 고민과 제도적 보완의 필요성을 지금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러 제작자들의 말처럼 지금이 바닥을 튼튼히 할 좋은 기회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