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황이다.” 2012년의 끝자락을 아직 두달이나 남겨두고 있지만 올해 한국 영화산업은 당장 샴페인을 터트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파죽지세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가 발표한 ‘2012년 9월 한국 영화산업 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1월1일부터 9월30일까지 한국영화를 본 관객수는 8162만여명이다. 이 속도대로라면 올해 연말까지 한국영화를 관람한 관객수가 1억명을 최초로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도 덩달아 50%를 회복했다. 한국영화의 상반기 시장점유율은 53.4%를, 비수기인 9월은 무려 69.6%를 기록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1월부터 9월까지의 박스오피스 상위 10편에 무려 7편의 한국영화가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도둑들>과 <광해, 왕이 된 남자> 등 두편이 1천만 관객을 기록했고,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내 아내의 모든 것> <연가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건축학개론> <댄싱퀸>까지 총 8편이 4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불러모았다. 무려 25편의 영화가 100만 관객을 동원했다.
한국영화의 극장 흥행뿐만 아니라 IPTV를 비롯한 인터넷 VOD 등 부가판권시장의 성장 역시 눈에 띈다. 2000년대 내내 가파르게 무너지다가 2009년(매출 888억원)을 기점으로 상승세로 돌아선 부가판권시장은 2010년의 1108억원을 거쳐 지난해 1709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특히 IPTV와 디지털케이블TV 등 스마트TV를 기반으로 한 영화콘텐츠 부가시장이 성장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 소속 홍지만(새누리당) 의원이 10월15일 영진위 국정감사에서 밝힌 자료에 따르면 IPTV와 디지털케이블TV의 영화 콘텐츠가 2009년의 262억원에서 지난해의 910억원으로 247% 성장했다고 밝혔다. 영진위 황동미 연구원은 “그중 94%가 한국영화다. 특히 <써니>가 약 2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고 설명했다.
수치 보면 부활이 맞지 않냐고?
영화인들 역시 올해 한국영화가 선전했다는 사실에 고무됐다. <광해, 왕이 된 남자>를 제작한 리얼라이즈픽쳐스 원동연 대표는 “올해는 ‘1천만 영화’가 한해에 두편이나 나온 사실보다 8편의 영화가 400만명 이상을 동원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라며 “그것은 한국영화가 관객에게 신뢰를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관객 역시 한국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고 본다”고 한국영화가 부활했음을 강조했다. 위에서 나열한 화려한 수치만 보면 올해 한국 영화산업이 호황기에 접어들었다고 단언하긴 어렵지만, 한국영화가 다시 상승 국면에 접어든 건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상승세가 영화산업이 ‘붕괴’됐던 2007년 이후 지금까지 발생한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했음을 뜻하는지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한국 영화산업이 위기를 겪기 전인, 그러니까 제작사들의 상장 열풍이 불었던 2006년부터 흐름을 되짚어봐야 할 것 같다. 2004년 명필름과 강제규필름 그리고 세신버팔로가 합병해 만든 MK픽쳐스를 시작으로 튜브엔터테인먼트가 영진닷컴과 합병돼 미디어코프로, 자회사로 아이필름을 둔 싸이더스HQ가 라보라를 인수해 IHQ로 탈바꿈하는 등 우회상장 열풍이 시작됐고 충무로의 제작사들은 속속 이 대열에 합류했다. 또 LJ필름은 프라임그룹과, 싸이더스FNH는 KT와 손잡는 등 거대 자본과의 결합도 진행됐다. 이렇게 자금력을 갖춘 제작사는 너도나도 라인업을 내놓았다.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신인감독이 ‘입봉’하기 쉬워졌으며, 현장에서는 스탭과 카메라 장비를 확보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한국영화 연간 100편 제작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연간 100편 제작은 분명 한국 영화산업에 독이 되었다. 공급이 지나치게 늘어나자 유통(배급)이 어려움을 겪게 된 것. 관객을 만나야 할 최소한의 개봉 시기를 확보하지 못한 채 수많은 영화들이 일찍 간판을 내려야 했고 일부는 개봉조차 못하게 됐다. 결국 수익률 악화로 이어졌다. 2008년의 -43.5%라는 역대 최저 수익률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수익률 저하로 인해 영화산업은 더이상 투자자들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었다. 영화에 매력을 잃은 많은 투자자들이 충무로를 빠져나갔고, CJ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롯데엔터테인먼트 등 당시 메이저 투자배급사는 조심스러운 투자로 방향을 선회했다. 어쩔 수 없이 영화인들은 자구책으로 손익분기점을 낮추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니까 제작비와 마케팅(P&A)비용을 절감하는 등 제작자는 제작자대로, 스탭은 스탭대로 허리띠를 졸라매기로 한 것이다표1 참조. 때문에 많은 스탭들이 어쩔 수 없이 영화 일을 그만두거나 방송 같은 다른 분야로 진로를 바꿔야 했다. 총제작비가 10억원 이상 20억원 미만의 영화를 뜻하는 ‘10억원 영화’라는 신조어가 생긴 것도 2009년부터다. 프로덕션이 방만하게 운영됐던 과거와 달리 프리 프로덕션과 투자를 신중하게 진행하게 된 교훈은 분명 있었지만 10억원 영화는 확실히 영화인 모두가 제 살을 깎아먹는, 기형적인 제작 방식이었다. 당시 영화계는 “이번의 위기를 새로운 시스템을 갖출 때 교훈으로 삼자”며 값비싼 수업료를 치렀다고 말했다. 그사이 대기업은 저예산 상업영화의 제작을 실험하기도 했다. 지난해 <티끌모아 로맨스>(독립영화 제작사 인디스토리와 공동 제작)부터 올해 초 개봉했던 <화차>까지 제작한 뒤 잠깐 간판을 내린 CJ엔터테인먼트의 저예산 상업영화 제작 레이블인 필라멘트픽쳐스가 대표적인 예다. 어쨌거나 지난 4, 5년간 위기를 겪으면서 한국 영화산업은 스탭의 고용 불안정과 처우 악화, 제작사의 붕괴, 투자배급사로의 권력 집중화 등 구조적 문제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수익률 상승은 평균 제작비 절감 효과다
다시 위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올해 한국영화의 상승세는 지난 몇년간의 위기에서 발생한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한 뒤 얻은 결과물인가. 글쎄, 일단 지난 몇년간 좋아지고 있는 한국영화의 수익률부터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표2 참조. 최근 몇년간 영화 수익률이 상승하고 있는 이유는 2009년의 약 15억원, 2010년의 약 13억원, 2011년의 약 15억원처럼 평균 제작비가 절감됐기 때문이지 많은 수익을 올렸기 때문이 아니다.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가장 먼저 쉽게 손을 댄 부분이 바로 스탭 인건비다. 상업영화 7편 경력의 한 촬영부 스탭은 “4년 전이나 지금이나 받는 돈은 비슷하다. 월 100만원 남짓한 돈을 촬영하는 3, 4개월 동안 받는다. 생활비, 교통비, 병원비 등으로 쓰면 남는 게 없다고 보면 된다”고 예나 지금이나 나아지지 않는 스탭 처우에 대해 불만을 터트렸다. 불안정한 스탭들의 고용과 처우 문제 때문에 많은 스탭들이 현장을 떠났다. 이 현상은 현장의 전문성 악화와 직결됐다. 한 프로듀서는 “5, 6년 정도 경력을 쌓아 겨우 촬영 퍼스트가 됐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2, 3년만 경력을 쌓으면 퍼스트가 될 수 있다. 많은 스탭들이 오래 버티질 못하니까”라며 “매 작품 포커스풀러(Focus Puller, 카메라의 초점과 포커스 그리고 노출을 담당하는 촬영팀 스탭. 충무로에서는 촬영팀 퍼스트가 이 역할을 맡는다)를 구해야 하는 촬영감독도 더러 있다. 포커스풀러야말로 할리우드에서는 60살 넘는 할아버지가 맡을 정도로 전문성이 요구되는 촬영 포지션인데 말이다”라고 설명한다. 스탭의 전문성이 떨어질수록 영화의 퀄리티가 어떠할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어쨌거나 스탭의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한국영화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제작사는 약해지고, 투자배급사는 막강해지고
프로덕션이 붕괴되고, 투자배급사의 자금이 막강해지면서 중견 제작사들의 힘이 약해진 것도 문제라면 문제다. 2007년 이후 제작사들이 값비싼 수업료를 치르는 동안 CJ, 롯데, 쇼박스 등 투자배급사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감독과의 직접 접촉, 자체 제작, 공동 제작 그리고 제작 대행 등 다양한 방식의 직접 제작을 실험해왔다. 그 과정에서 제작사와 투자배급사간의 갑을 관계가 지나치게 위축되었다. 투자배급사는 투자계약서에 배급 수수료표3 참조를 포함해 해외수출, 라이선싱, 제작비와 금용비용 및 관리수수료 등 과거에 비해 더욱 세분화된 각종 수수료를 제작사에 요구한다. 계약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만 배우 캐스팅과 스탭 세팅까지 영화 제작의 거의 모든 공정에서 제작사는 투자배급사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게 현실이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는 “만약 <공동경비구역 JSA>가 지금 제작된다면 이 영화는 투자배급사의 투자를 절대 받지 못할 것이다.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과 <3인조>가 흥행에 연달아 실패한 탓에 누가 박찬욱 감독에게 투자하려하겠는가”라며 “투자배급사가 구축한 영화 제작 관련 데이터가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지만 영화는 데이터 이상의 무언가가 작용하는 산업이다. 그중 하나가 제작자의 경험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명필름 같은 중견 제작사는 그나마 덜하지만 경력이 짧은 후배 프로듀서들은 투자배급사의 까다로운 투자 계약서 때문에 투자배급사에 많이 휘둘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제작사의 힘이 약해진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그런 이유로 감독(<씨네21>_874호 기획기사 ‘감독 수난시대’ 기사 참조), 제작자, 스탭 등 여러 분야에서 제작자가 부활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아 보인다. CJ엔터테인먼트의 한 관계자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흥행 성공을 통해 “CJ의 자체 기획, 개발 시스템과 제작사의 아웃소싱의 결합이 CJ 내부에서 힘을 얻은 것 같다. 당분간은 이런 방식의 공동 제작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투자배급사 입장에서는 자사의 돈으로 여러 비즈니스 모델을 시도하는 게 무슨 잘못이냐고 물을 수 있겠다. 그러나 투자배급사의 선택이 산업의 여러 구성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지 피해가 갔다면 그건 분명 잘못된 일이다. 산업의 선도 기업인 만큼 영화계의 구성원 모두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자는 얘기다. 여전히 적지 않은 영화인들이 “상영과 배급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정책과 관련 법률 입안 등 공적 영역의 힘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것을 보면 CJ를 비롯한 대기업 투자배급사가 선도 기업에 어울리는 행보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공정 경쟁 가능한 생태계 형성이 관건
위에서 언급한 여러 이유 때문에 올해 한국 영화산업이 호황이라고 말하기가 사실 꺼려진다. 그나마 반가운 소식은 지난 8월17일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하 노조)과 한국영화제작가협회(이하 제협)가 체결한 노사간 임금 및 단체협약(이하 임단협)과 지난 5월 체결한 시나리오표준계약서이다. 임단협은 영화산업 최저임금, 표준계약서, 4대 사회보험 완전 적용, 촬영부 B팀 같은 일 단위로 고용되는 추가 인력의 최저임금 인상 등을 실질적으로 합의한 협약이다. 노조와 제협 양쪽이 처음 테이블에 앉은 2007년 이후 거의 5년 만에 이루어진 체결이다. 시나리오표준계약서는 시나리오작가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표준계약서를 뜻한다. 두 가지 안전장치가 현장에 완전히 자리잡힐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은 걸리겠지만 스탭의 고용안정의 일보 진전을 기대해볼 만한 일이다.
영화산업의 지형도가 콘텐츠 중심에서 유통 중심으로 변화하는 동안 아직도 영화계의 여러 분야에서는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올해의 상승세가 일시적인 호황이 될지 아니면 제3의 한국영화 르네상스기가 될지는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영화계 생태계가 마련되는가에 달려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