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쉼없이 걸었다. 롯폰기힐스의 모리타워에서 시작해 쓰타야 서점을 거쳐 그의 숙소가 있는 아카사카까지 걸어갔다. 별별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쓰고 있는 중인 책, 빨리 차기작을 만들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 그의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여행 등. 그중 도쿄에 도착하기 전 여행했던 루모이라는 동네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유독 즐거워 보였다. 루모이? 일본 최북단의 삿포로에서 기차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항구 마을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바다 건너편의 러시아 대륙이 보인다나. 그때 그는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머리가 무거워서 다녀왔어요. 그곳에 갔더니 마을이 참 평화롭고 조용해서 좋았어요. 덕분에 복잡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었어요.”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복잡하게 엉켜 있던 무언가를 길에서 정리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이것은 지난해 이맘때쯤, 단편 <폴라로이드 작동법>, 장편 데뷔작 <조금만 더 가까이>를 만든 김종관 감독과 도쿄에서 우연히 만나 겪은 일화다.
1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가 쓰고 있다던 책이 나왔다. 책은 역시나 그와 닮았다. 매일매일 사라지고 있는 동네, 일상, 습관, 기억을 잊지 않고 붙잡으려는 듯 그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풍경을 글과 사진으로 담아냈다. 이성에 대한 마음이나 과거 연애담(<배란기> <그림자> 등)은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또 때로는 시니컬했으며, 그의 어린 시절(<미안합니다>)이나 아버지에 대한 추억(<뺨을 맞다>)은 참 애틋했다. 그가 한 여행은 외롭게 느껴지기도 하고(<교토의 두루미> <호쿠도세이>), 쉽게 겪지 못할 인연을 만나는 까닭에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청주 거리에서 만난 여자>). 그런 기록들이 하나씩 쌓여 그의 차기작 어딘가에 심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내가 영화를 만들길 잘했다고 느끼는 것은/ 내 허비되고 실패하고 아깝게도 다시 올 수 없는 지난날의 힘들로/ 결국 영화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내 버려진 시간들이 다시 한번의 기회를 선물로 받는다.”(115쪽 <기회>) 한장 한장 넘기다가 반가운 이야기를 만났다. <루모이로 가는 길>. 문득 지난해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