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2일 월요일 아침. 선택을 해야 했다. 스페셜 스크리닝 부문에서 상영되는 수오 마사유키의 신작 <터미널 트러스트>를 볼 것인가, 영화 외적으로, 내적으로 올해 영화제의 가장 뜨거운 작품인 경쟁부문의 영화 <펑 슈이>를 볼 것인가. 결국 도쿄를 떠나기 전 상영을 단 한번밖에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터미널 트러스트>를 선택했지만, 같은 시간 <펑 슈이>를 본 외신기자로부터 “올해 이곳에서 본 영화 중 가장 훌륭하다”라는 평가를 듣고는 그 말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영화를 본 뒤 그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펑 슈이>는 과연 중국영화의 새로운 발견이다.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는 한 여자의 우여곡절 많은 인생을 배경으로 현대사회 속 중국인들의 단절감과 소통의 부재를 예리하게 포착해낸 감독 왕징의 연출력에 주목할 만하다.
‘풍수’(펑 슈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삶의 터전을 옮겨 새출발을 다짐하는 여자 리바오리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남편, 아들과 함께 남편의 회사가 제공해준 아파트로 이사를 한다. 하지만 더이상 공동 화장실을 쓰지 않아도 되고, 안락한 ‘내 집’이 생겼다는 기쁨은 잠깐이다. 바오리의 억척스럽고 공격적인 성향에 질린 남편은 이혼을 요구하고, 급기야 회사 동료인 유부녀와 불륜에 빠진다. 남편과 낯선 여자가 여관방에 들어가는 걸 목격한 그날, 바오리는 경찰에 전화를 걸어 매춘이 벌어지고 있다며 그들의 밀회 장소를 신고한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변한다. 경찰에 붙잡혔다는 이유로 해고된 남편은 상실감에 자살하고, 큰 충격을 받은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의 원인을 엄마에게 돌리며 마음의 문을 닫는다. 설상가상으로 머무를 곳을 잃은 시어머니가 함께 살겠다고 상경한다. 한꺼번에 찾아온 모든 불행에 대해 바오리의 친구는 “풍수 때문”이라고 한다. 바오리의 새 집터가 “만개의 창이 심장을 꿰뚫는” 장소에 위치했다는 이유에서다. 과연 바오리의 불행은 친구의 말대로 잘못된 집터 때문일까.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연이 작용하는가. <펑 슈이>의 백미는 사람과 사람, 상황과 상황이 충돌하며 빚어내는 불협화음의 에너지를 체감하는 것이다. 여주인공 바오리를 포함해 이 영화의 등장인물 대부분이 누군가와 갈등을 겪고, 자신의 인생을 건 채 그 갈등의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왕징은 인물의 행방을 쫓다가도 종종 부감숏으로 그들이 위치한 공간을 들여다본다. 바오리의 아파트 옥상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매우 혼잡하다. 길은 사방으로 뚫려 있고, 인간과 자동차들이 바쁘게 그곳을 오간다. 친구의 말처럼 그 모든 것들이 교차하는 지점이 바오리의 마음이라면, 인생은 얼마나 고단한 것인가. <펑 슈이>의 카메라는 1990년대 이후 눈부신 경제 성장과 더불어 중국사회의 개개인이 겪게 된 불안과 혼란의 이미지를 잿빛 화면에 담아낸다. 그 방식이 과장되지 않고 담백해서 좋다. 이 영화엔 이런 주제를 다룰 때 수많은 중국영화들이 범하는 과장과 비장함이 없다. 그건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은 채 모든 상황을 담담하게 조명하는 왕징의 연출 스타일 때문이다.
무엇보다 배우에 주목해야 한다. 리바오리를 연기한 양빙안은 아직 중국 외부의 관객에겐 낯선 이름이다. 이전까지 주로 TV드라마에 출연해왔다는 그녀의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바오리의 삶에 완전히 몰입하게 만든다. 점점 더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고단한 삶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한 여인의 생명력을 아무나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필름비즈니스 아시아>는 양빙안의 연기를 한국 배우 전도연에 비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자신의 이미지를 영화에 투영하기보다는, 맡은 캐릭터에 스스로를 동화하는 카멜레온 같은 자질을 갖췄다”는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