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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슬픔을 끌어안으라
송경원 사진 최성열 2012-11-06

허진호 감독이 영화화하는 <덕혜옹주>

<덕혜옹주>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펴냄

유년 시절의 덕혜옹주, 남편 다케유키 백작과 덕혜옹주(왼쪽부터)

<덕혜옹주> 감독 허진호 / 출연 미정 / 개봉 2013년 하반기

드라마는 비극의 그늘에서 꽃핀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는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비극의 냄새가 난다. 망국의 공주. 이야기꾼이라면 군침이 돌 만한 소재이건만 신기하게도 그녀를 다룬 이야기는 한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녀 아나스타샤를 다룬 소설과 영화가 숱하게 쏟아져나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귄비영 작가의 장편소설 <덕혜옹주>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대중에게 덕혜옹주는 생소한 이름에 불과했다. 이 비운의 옹주는 그만큼 우리 역사에서 지워진 존재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60만권이나 팔리며 이토록 대중의 사랑을 받을지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덕수궁의 꽃이라 불렸던 덕혜옹주는 고종황제가 유난히 아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채 꽃피우기도 전에 망국의 한을 안고 스러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의지와 관계없이 일본으로 끌려갔고 해방 뒤에도 마음대로 돌아올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기억에서마저 서서히 사라져간 그야말로 조선 왕실의 비극 그 자체다. 소설 <덕혜옹주>는 그런 그녀의 삶 전반을 다루고 있다. 잘 알려진 사연이 아니었기에 대체적으로 덕혜옹주의 생애를 전달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이 소설은 특별히 드라마적 상상력을 동원하거나 픽션을 첨가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럴 단계도 아니었다. 한발 앞서 나온 일본 작가 혼마 야스코의 평전 <덕혜옹주: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처럼 덕혜옹주의 삶을 담담히 묘사할 뿐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멜로의 마술사 허진호 감독의 손에 의해 재탄생할 영화 <덕혜옹주>가 기대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이제 우리는 덕혜옹주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1931년 대마도주 소 다케유키 백작과의 강제 결혼부터 1956년 외동딸의 자살, 1962년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15년이나 정신병원에 방치된 채 살았던 그녀의 삶은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조선 왕실 마지막 황녀의 운명이란 비극에 사로잡혀 인간 이덕혜의 얼굴을 놓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허진호 감독의 섬세한 현미경과 상상력이 필요한 곳도 바로 이 지점이다.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강제 유학 보내진 여린 소녀는 어떤 얼굴을 하고 그곳에서 버텼을까. 아버지 고종이 일본인들에게 독살되었다고 믿던 그녀가 일본인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야 하는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그 밖에도 옹주의 정혼자이자 그녀를 일본에서 탈출시켜려 애쓰는 애국청년 김장한(소설에서는 박무영으로 개명)과의 숨겨진 로맨스, 억지 결혼한 다케유키 백작과의 관계까지 궁금한 순간들은 넘쳐난다. 이제 드디어 이 이야기에 상상력의 살을 제대로 붙일 때가 왔다. 망국의 옹주를 섬세하게 조각해낼 손길의 주인공이 허진호라 정말 다행이다.

우리가 보고 싶은 건 전기영화가 아니다.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생애는 이제 제법 알려졌다. 그것만으로도 의미있지만 그것만 고스란히 옮긴다면 굳이 영화화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이 이야기에는 응당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이 마땅하다. 그녀의 생을 전부 반추할 필요는 없다. 모든 순간이 드라마로 가득 차 있는 흔치 않은 삶이라 오히려 그게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삶이 흔들리는 한순간을 기가 막히게 잡아온 허진호라면 이 난제를 푸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부디 옹주의 전기가 아니라 여인 이덕혜의 삶을 담아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