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증에 대해 끼적이려는 순간, 곰삭은 탄식처럼 한숨부터 흘러나온다. 혹자들은 여성혐오가 이 시대에 불려나온 특이한 푸닥거리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상 ‘옛날 옛적 그 고대 세계’부터 참 질기게 명줄을 이어온 유물이잖은가. 여아 살해와 여성 할례의 고대사회를 지나, 화끈한 중세의 마녀사냥을 경유하고 이 모던한 시대에도 여전히 횡행하는 이 지긋지긋한 여성혐오. 숨통이 끊어질 것 같았던 가부장제는 아직도 튼튼한 심장을 갖고 있나 보다.
물론 이제 대놓고 여성을 차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은 여성우대사회이며, 남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남성연대’ 같은 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한다. 이들이 보기에 현대 여성들은 스타벅스를 즐기는 된장녀들이며, 운전대 잘못 놀려 교통사고를 일으키는 도로 위의 김 여사들이며, 죠리퐁 여성가족부가 갖은 수단을 동원해 보호하는 특별한 지위의 보슬아치 종족이다. 성재기와 그를 영웅시하는 남성들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여성은 두 종류. 자신들 입맛에 맞는 ‘개념녀’들과 ‘나쁜 년’들이다.
이들에게 한국의 여성들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 얼마나 열악한 위치에 있는가를 통계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제 자신이 더 열악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노동시장과 기형적인 분배 시스템에서 낙오된 삼포 세대(취업,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이자 잉여들인 자기 처지에 비해 스타벅스에 앉아 우아를 떨고 있는 된장녀와 키가 작다고 약올리는 키 큰 루저녀들은 얼마나 시건방지게 안락한가.
‘위기’는 약자를 희생양으로 소환한다. 서구 중세 때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고 소문을 퍼뜨리며 유대 게토를 붕괴시키거나, 약초에 대해 지식이 많은 여성들을 마녀사냥하는 것으로 시스템을 유지했던 것처럼, 한국의 여성혐오증자들 역시 못된 페미니스트들과 ‘나쁜 년’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일베 같은 사이버 공간에 모여 가상의 화형식을 치르는 저 잉여들의 세계는 희생양으로 여성들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이주노동자들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소환하고 있다. 바야흐로 혐오의 계절이다.
혐오의 진원에는 공포가 자리한다. 그리고 공포는 낯선 것에서 기인한다. 여성들이 오히려 남성들을 저울질하는 역전된 상황 앞에서, 성적 대상화에 길들여진 이성애 남성들이 정작 자신들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동성애자들과 마주해야 하는 낯선 시대 앞에서, 노동시장의 각축장 안에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부대껴야 한다는 이질적인 풍경 앞에서 한국의 젊은 남성들은 그 불안을 혐오로 대체하고 있다.
경제적 불안으로 점화된 혐오의 불길이 가부장제 위기라는 심지를 태우고 있는 형국이랄까. 최근의 여성혐오가 IMF를 경유한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여성부 강화, 그리고 호주제 폐지부터 시작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여성혐오의 광풍은 사회 시스템에 대한 대안적 정치와 상상력을, 그 적절한 분노의 표출을 찾지 못한 한국 남성의 불안한 표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른바 거세공포증.
오빠들아, 찌질하게 타자들을 혐오할 시간에 더 많은 분배,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해야 할 시간이다. 그게 그 참을 수 없는 불안을 근원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길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