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가 <도둑들>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1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올해 두 번째’라고 표현하니 뭔가 흔한 일인 듯싶지만 그것은 무척 의외의 결과다. <도둑들>에 이은 <광해>의 성공요인은 뭘까. <광해>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에는 <마지막 늑대> <미녀는 괴로워> <마린보이> 등을 제작한 리얼라이즈픽쳐스 원동연 대표의 힘이 컸다. 당초 강우석 감독이 <나는 조선의 왕이다>라는 제목으로 시작했던 작품이 원동연 프로듀서, 추창민 감독, 그리고 이병헌에 의해 <광해>로 다시 태어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가 구상하는 ‘새로운 판’까지, 그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기로 한 작품이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지난해 9월경 CJ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괜찮은 시나리오가 있는데 공동제작형식으로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나는 그때 <신과 함께>에 빠져 있던 때라 안 한다고 했더니 읽어나 보라고 했다. (웃음) 마지막 장을 딱 덮고는 이거 안 하면 후회하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내가 바로 <국가대표> 거절한 프로듀서 아닌가. (웃음) <국가대표>를 기획까지 다 끝내고 지분만 조금 받고는 결국 넘겨주고 나와서 <마린보이> 했던 기억이 떠올라 무조건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광해>는 투자배급사 CJ와 제작사간의 ‘상생 프로젝트’ 1호다. 이미 CJ에서 기획, 개발을 끝낸 작품에 뒤늦게 합류하게 되면서 어떤 조율 과정을 거쳤나. =CJ가 기획, 개발을 맡고 리얼라이즈픽쳐스가 감독과 배우를 비롯한 캐스팅 및 스탭 구성, 촬영에서 후반작업, 개봉까지 작품 완성을 책임지는 방식으로 제작이 진행됐다. 가장 확고하게 요구했던 것은 캐스팅과 스탭 구성에 대한 전권을 달라고 했고 기존에 강우석 감독님이 계실 때 논의됐던 예산은 무조건 지키겠다고 했다. 그리고 애초 시나리오에서 유머를 좀더 많이 넣고 여러모로 우리식으로 바꿔보자고 했다.
-추창민 감독에 대한 확신은 있었나. =마이너리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있다. <마파도>도 주인공들이 난데없이 여러 할머니들에게 말도 안되게 봉변을 당하는 얘기고, <사랑을 놓치다>도 인기종목이라고 하기 힘든 조정 선수가 주인공이고, <그대를 사랑합니다>에도 치매 노인과 그 주변 노인들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광해>에서 왕 노릇을 하는 하선의 모습도 그런 것 아닌가.
-<도둑들>과 비교하자면 <광해>는 이병헌의 원톱영화다. 이른바 ‘월드스타’가 아닌 ‘인간 이병헌’에서 풍기는 면모가 흥행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이병헌을 캐스팅한 것만큼은 내가 마땅히 칭찬받아야 한다. (웃음) 처음부터 이병헌은 무조건 캐스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추 감독에게도 이병헌이 개그본능도 있어서 폭발력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이병헌과 이재규 감독의 <인플루언스>를 하면서 평상시 그의 소탈함이나 인간적 매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관객에게는 그에 대한 묘한 괴리감이 있다. 한류스타, 월드스타 그런 표현처럼 다들 좋아하긴 하는데 뭔가 다른 세계사람처럼 느껴져서인지 친근함을 못 느끼는 것 같다. 그런 그가 똥 싼다고 엉덩이를 까고, 사월이(심은경)에게 얘기 한번 해보라고 하고, 조 내관(장광)에게 어쩌다 그리 됐는지 도닥여주고, 중전(한효주)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고 하니, 마치 동네 형과 시장에서 떡볶이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나는 거다.
-이병헌은 계속 해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캐스팅 과정이 만만찮았을 것 같다. =소속사인 BH엔터테인먼트의 손석우 대표 힘이 크게 작용했다. 그도 이병헌이 하면 좋을 작품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손 대표가 <지.아이.조.2> 촬영 때문에 뉴올리언스에서 LA로 갈 예정인데 LA로 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말하자면 나는 자존심 따위 다 버리자고(웃음) 추 감독을 설득하고, 손 대표는 형이 해야 할 작품이라고 이병헌을 설득해서 <광해>가 만들어지게 됐다.
-한명의 관객 입장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고른다면. =중전이 오라버니인 유정호에 관한 일을 가지고 “왜 그러셨어요?” 하고 물었을 때 광해가 “마마 님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대동법 어쩌고 하면서 신하들 막 다그치고 그러는 장면 말고 광해의 순정이랄까,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관한 장면이기도 한데, 내가 좀 로맨티스트다. (웃음)
-류승룡, 장광, 심은경, 김인권, 김명곤 등 주변 배우들의 ‘포스’도 만만찮다. =사실 처음에 장광씨는 내가 반대했다. <도가니>의 악질 교장이 <광해>의 멘토로 오는 건데 기분이 영 별로였다. (웃음) 실제로 <도가니> 쫑파티 때 내가 술이 취해서는 장광씨한테 가서 한대만 때려도 되겠냐고 한 적 있다. 그 얘기를 예능 프로그램인 <세바퀴>에서 하셨더라. (웃음) 현장에서 헤드폰 끼고 듣고 있으면 정말 환상이다. 밀폐된 실내 공간에서 이병헌, 류승룡, 장광, 이 세 사람의 ‘목소리 배틀’이 벌어지는 거다. 거의 10년 만에 영화에 출연한 김명곤씨의 경우 시나리오를 보고는 펑펑 우셨다더라. 김대중 정권에서 국립중앙극장 극장장, 노무현 정권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내신 분이라 돌아가신 전 대통령들 생각이 나신 거다. 그런데 광해의 반대세력 리더라는 게 참 재밌다. 올해 봄 이순재, 전무송 선생이 출연하는 <아버지>라는 작품을 연출하셨는데 무대에 올리기 전까지 몇달을 연습해야 하는데도 출연해주셨다. 심은경은 미국 유학 중인데도 봄방학 때 와서 찍고 뒤에 한번 더 와서 찍었다.
-김명곤 전 장관에 대한 얘기를 듣고 보니 <광해>가 지금 시점에서 큰 흥행을 거두고 있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대선’이다. 영화 속 광해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안철수 후보를 연상시킨다는 얘기가 많다. =개봉이 무조건 9월이나 10월이어야 한다고 했다. 대선 후보들의 윤곽이 나온 다음 ‘이 시대 진정한 리더의 조건이 뭐냐’ 하는 화두를 현실과 겹쳐놓자는 승부수였다. “부끄러운 줄 아시오”, “조강지처를 버리란 말씀입니까?”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대사들은 직접적으로 많았는데 많이 뺀 거다. 안철수 후보의 경우 시나리오 쓸 때나 영화 제작할 때나 전혀 안개 속의 인물이었는데 기성 정치인들과는 다른 ‘무소속’이라는 점에서 연결짓는 시선이 많다. 그렇게 다 각자 마음 속에 있는 대통령의 모습을 그리면서 영화에 공감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전두환, 노태우 얘기는 아무도 안 하더라. (웃음)
-촬영과정을 지켜보며 딱 ‘감’이 올 때가 있었나. =감독과 배우들에게 가장 미안한 게, 스케줄 때문에 촬영을 폭력적으로 진행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가짜가 진짜로 돼가는 과정을 연대기 순으로 촬영해야 하는 게 맞는데, 그러려면 세트를 4개월 이상 잡아둬야 하니 예산이나 여건상 그건 무리였다. 모든 배우들이 광해의 변화에 맞춰 감정을 에스컬레이팅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다시 찍을 각오하고 예비비도 마련한 상태에서 한달 동안 세트에서 찍었다. 그런데 이병헌이 처음과 중간과 엔딩의 ‘하선’을 다 몰아서 찍는데도 정말 다 다른 거다. 이거 진짜 뭐 하나 나오겠다 싶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마음 놓고 트위터에 온천 다녀왔다, 시장 가서 뭐 샀다, 하는 멘션들만 올렸다. 전혀 걱정이 없었으니까. (웃음) 정말 프로듀서로서 날로 먹은 영화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광해>를 향한 비판의 시선도 있다. 두 가지로 압축하자면 이반 라이트먼의 <데이브>(1993)와의 유사성에 대한 지적과 스크린 독과점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다. =앞서 강우석 감독이 <나는 조선의 왕이다> 연출의 변을 밝히면서 인터뷰에 <카게무샤>나 <데이브>를 언급한 적이 있더라. 그래서 뒤늦게 추 감독과 <데이브>를 봤다. 그런데 <왕자와 거지> 같은 고전에서 드러나듯 그 역시 큰 오리지널리티가 없는 얘기고 1인2역, 중전과의 사랑, 정치적 각성이라는 측면에서 오랜 전형성을 가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영화비평가 듀나가 <데이브>와 비교하며 썼던 글이 그에 대해 잘 정리해준 것 같다. 스크린 독과점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광해>가 비수기를 통과하면서 시장의 볼륨을 키워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크린 수 자체보다 그것에 대한 공과도 인정해줬으면 싶고 객석점유율 자체가 여전히 가장 높다.
-어느덧 후배 프로듀서들이 더 많은 위치가 됐다. 상생 프로젝트 1호의 제작자로서 건네고 싶은 얘기가 있나. =친한 후배들에게도 사람들을 잘 규합해서 상생 프로젝트에 참여하라고 말하고 다닌다. 요즘은 개발비 마련이 어려워서 기획개발이 힘들다. 그런데 대기업 창고에 쌓인 수많은 기획개발 작품들 중에 ‘물건’이 될 만한 게 많다. 사실 주변에서 자본의 주구가 될 거냐고 나를 욕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신과 함께>는 그것대로 독자적으로 제작하면서 상생 프로젝트도 진행한다. 물론 신인감독이나 제작자들이 뛰어들기 힘든 구조긴 하지만 그건 좀 어쩔 수 없는 문제고, 제작대행료나 수익 중 지분 역시 계속 높여가야 한다. <광해>라는 작품에 내 역량이 들어가서 다른 포맷으로 만들어 이런 성과를 냈으니 주변에서 이젠 다른 시각으로 볼 것 같다.
-제작했던 이전 작품들을 돌이켜보면 유난히 아쉬운 영화가 있나. =가장 마음 아픈 영화는 <마지막 늑대>다. 한국 영화계에도 우디 앨런이나 코언 형제같은 엇박자 유머의 코미디영화가 먹히지 않을까 했었다. 삶의 궤도에서 벗어난 루저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로 벗어나려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벗어날 수 없는 우리 현실에 대한 얘기였다.
-<도둑들>과 또 하나 비교하자면, 추창민 감독이 워낙 양지로 나오지 않아서인지(웃음) 프로듀서의 이름이 전면에 많이 나서는 영화가 <광해>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부회장으로 영화계 일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는데, 프로듀서로서의 존재증명이라는 측면에서도 <광해>는 중요한 인상을 남겼다. =과거에 비해 우리 같은 전문 프로듀서들이 쇠락해가고 있는 건 분명하다. 투자배급사는 감독과 다이렉트로 붙는 일이 흔하고, 그러면서 작품의 퀄리티가 떨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 중간에서 분명 프로듀서가 해야 할 몫이 있고 자리도 있다.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내지 못한 선배나 우리의 잘못도 있는데 혹시나 <광해>가 그런 프로듀서의 신뢰나 역할론에 대한 생각을 각인시켜줬다면 대단한 영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