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국제경쟁 단편영화제인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90여국의 참여가 증명하듯 전세계 영화인들의 관심 속에 치러지는 이번 영화제는 10주년을 맞아 한층 풍성해진 작품과 부대행사를 준비해 관객을 맞을 준비를 마쳤다. 매년 단편영화의 활로를 만들어가고 있는 ‘트래블링 쇼츠’가 더욱 탄탄해진 것은 물론 ‘거장열전’과 ‘배우열전’을 통해 해외 유명배우와 감독들의 단편영화도 만날 수 있다. “R.U.Short?”란 슬로건 아래 단편영화와 대중의 소통을 모색하는 이번 영화제의 작품들은 11월1일부터 6일까지 씨네큐브 광화문에서 만날 수 있다.
개막작
<JURY> 김동호 / 한국 / 2012년 / 24분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10주년을 기념하여 기획제작된 <JURY>는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의 첫 연출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주목의 대상이다.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의 실제 심사위원 5인(안성기, 강수연, 정인기, 토니 레인즈, 도미야마 가쓰에)이 직접 출연하여 영화제의 속살과 뒷이야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여배우, 우유부단한 심사위원장, 시종일관 비판만 하는 비평가, 언어문제로 소통이 어려운 외국감독까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조합이 빚어내는 웃음이 날카롭고 유쾌하다. 그야말로 영화계의 어르신만이 만들 수 있는 훈훈한 농담 같은 영화다. 영화제에서 길을 잃고 헤매본 사람이라면 크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경쟁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의 국제경쟁부문에는 국제영화제의 규격과 명성에 걸맞게 90개국에서 2152편(국내 559편, 해외 1593편)이 출품되었고, 그중 엄선된 55편의 본선 진출작이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작품부터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까지 총 7개 섹션으로 나눠 다양한 주제의식과 참신한 시도들을 선보인다.
<방아쇠> La Detente 피에르 뒤코스, 베르트랑 베 / 프랑스 / 2011년 / 8분30초 장난감들의 참호 쟁탈전이 벌어진다. 폭탄 대신 풍선을 쏘고 압정 대신 꽃이 깔려 있으며 놀이기구의 회전목마를 타면서 수류탄 대신 솜사탕을 먹는 그곳. 즐겁고 밝은 축제 중 프랑스인 병사는 사실 자신이 있는 곳은 1차 세계대전 참호전투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화사함으로 전쟁의 어두운 면을 역설적으로 증명한, 깊이있는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달콤씁쓸한 인생> Bittersweet Life 권순중 / 한국, 미국 / 2012년 / 18분 잭은 회사가 파산하여 모든 것을 잃는다. 재기를 꿈꾸기엔 버거운 60살의 CEO 잭은 브루클린의 선창가로 가서 자살을 시도하려 한다. 그곳에서 한 부랑자를 만나 죽기 직전 좋은 일 하는 셈 치고 옷을 바꿔 입은 잭. 하지만 이 사소한 행동이 절망 끝에 선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다. 사소한 사건을 통해 오늘을 살아가는 희망이 무엇인지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자연스런 연출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가슴 한구석이 훈훈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감독열전: 시네마 올드 앤 뉴
유명감독들의 초기 단편과 개성 넘치는 신작들을 함께 조망하는 ‘시네마 올드 앤 뉴’는 단편영화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획이다. 조지 루카스 감독의 재능을 알린 <전자 미로 THX 1138>(1967),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전위적인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야상곡>(1980), 독특한 상상력과 비주얼이 돋보이는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 싫어하는 것들> 같은 명작 단편은 물론, 아름다움을 주제로 허안화, 차이밍량, 구창웨이 감독과 함께 만든 옴니버스영화 <뷰티풀>(2012) 중 김태용 감독이 만든 <그녀의 연기>도 만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싫어하는 것들> Things I Like, Things I Hate 장 피에르 주네 / 프랑스 / 1989년 / 8분 <아멜리에>로 친숙한 장 피에르 주네의 동화적 상상력과 비주얼의 근원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감독의 페르소나인 도미니크 피뇽의 환상적인 연기가 눈에 띈다. 이미지의 연쇄를 통한 사소한 농담은 감독의 장편들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를 알려준다. 흑백 화면이 전하는 감수성이 영화의 깊이를 더한다.
<편지> The Letter 미셸 공드리 / 프랑스 / 1999년 / 14분 1999년 12월의 어느 밤. 13살 스테판은 형 제롬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새 천년, 종말 같은 거대한 이야기부터 좋아하는 여자아이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까지 사춘기 소년들의 말랑한 감성들이 화면 가득 채워진다. 꿈과 현실이 뒤섞이는 이미지 속에서 소년들은 그렇게 성장한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자전적인 영화이다.
배우열전
전세계 유명배우들이 참여한 단편영화들을 만날 수있는 특별하고도 이색적인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다. 주디 덴치, 콜린 퍼스, 키라 나이틀리, 커스틴 던스트 등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법한 유명배우들이 소재와 규모를 가리지 않고 단편영화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본다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게다가 배우들의 이름값만큼 출연한 단편영화들의 완성도도 탄탄하니 믿고 봐도 좋을 듯하다.
<친구 요청 중> Friend Request Pending 크리스토퍼 포긴 / 영국 / 2011년 / 12분 메리(주디 덴치)와 그녀의 친구 린다(페니 라이더)는 마을 합창단 지휘자인 트레버를 유혹하기 위해 소셜 네트워크를 이용하기로 한다. 하지만 인터넷 세상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이런저런 실수투성이다. 그럼에도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 곤란함마저 하나의 기쁨이다. 주디 덴치와 페니 라이더의 실제 얼굴이 문득 겹치는 노년의 행복한 오후를 그린 영화다.
<빵가게 재습격> The Second Bakery Attack 카를로스 쿠아론 / 멕시코, 미국 / 2010년 / 10분 신혼부부 네트와 댄은 엄청난 배고픔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빵가게 재습격>은 급기야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빵가게를 터는 커플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담아냈다. 카를로스 쿠아론의 장난기와 커스틴 던스트의 색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단편소설을 영화화했다.
트래블링 쇼츠 인 코리아
“단편영화로 숨어 있는 한국을 찾는다”는 슬로건 아래 2010년부터 기획된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만의 이 특색있는 섹션은 올해 153편의 출품작 중 5편을 선정해 관객에게 선보인다. 제주 해군, 해녀의 사랑을 다룬 다큐애니메이션 <할망바다>, 인천 덕적도를 배경으로 한 <오징어, 땅콩> 등 한국의 풍경을 보여주는 신선한 단편영화들을 만날 수 있다.
트래블링 쇼츠 인 재팬
일본의 대표적 국제단편영화제 숏쇼츠필름페스티벌&아시아 교환프로그램에 소개된 6편의 영화들이 소개된다. 트래블링 쇼츠 인 코리아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풍경과 문화, 감성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다.
<에라얏챠 요이> Erayaccha-Yoi! 우나카미 미사코 / 일본 / 2006년 / 15분4초 섹션의 관객상을 수상한 <에라얏차 요이>는 일본판 브라질 삼바축제인 아와오도리춤을 매개로 두 여자의 고민과 우정, 미묘한 심리를 찬찬히 포착해나간다. 아와오도리춤의 구호이기도 한 ‘에라얏차 요이’ 소리처럼 일견 생경해 보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감성들이 곳곳에 깔려 있다. 일본의 어제와 오늘,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짧지만 깊은 질문들을 던져주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