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찍은 영상을 보면서 토론하는 김태용 감독과 대학원생들.
오전 9시 수업이란다. 마포구인 집에서 단국대가 있는 경기도 수지까지 어림잡아 1시간 반 내지 2시간이 걸린다고 하면 적어도 새벽 6시 반에는 눈을 떠야 한다. 이런 낭패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먼저 잡는다지만 졸업한 지 8년 가까이 지난 내게 그건 아무래도 무리다. 미처 잠에서 깨지 못한 몸을 이끌고 서울역 환승센터에서 8100번 빨간 버스를 탔다. 40여분을 달렸을까. 버스는 친절하게 나를 학교 안에 모셔다주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걸어오면 서관 건물이 보일 겁니다.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이 그곳에 있어요.”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의 한 관계자가 보내준 문자를 확인하고 오른쪽을 바라보니 건물 하나가 보였다. 등교하는 학생에게 물어보니 서관이 맞단다. 건물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건물 입주 정보가 적힌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김동호, 윤제균, 곽경택, 김태용, 심재명, 오정완, 이유진, 박기용, 김미희, 정서경 등. 충무로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감독, 프로듀서, 시나리오작가들로 구성된 화려한 교수진이었다. 학교를 찾은 9월25일은 <만추>의 김태용 감독이 진행하는 ‘프로젝트 기획 및 시나리오’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이번 학기 3번째 수업이었다.
촬영한 영상보며 ‘컷 바이 컷’ 토론
전부 합쳐 4명이었다. 50명은 족히 들어갈 강의실에 김태용 감독과 학생 셋이 있었다. 이들은 칠판 앞에 반원을 그려 자유롭게 앉아 있었다. 한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영상을 틀었다. 습작인 듯 제목은 없었다. 러닝타임이 5분 남짓한 이 영상은 화장실에 앉아 있는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임신을 한 주인공 여대생이 화장실에 들어와 속상해하고 있던 중 옆 칸에 앉은 어떤 여성으로부터 위안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영상이 끝나자 김태용 감독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컷 바이 컷’(Cut by cut)으로 짚어나갔다. 그의 입에서 나온 가장 많은 얘기는 주인공 캐릭터였다. “지금 찍어온 영상만 보면 주인공이 어떤 캐릭터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주인공의 대사와 행동이 이야기의 주제, 톤 앤드 매너와 잘 맞물려야 하는데, 캐릭터가 명확하지 않다보니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산만한 것 같아.”(김태용) “저희가 생각한 건 민규동 감독의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임수정 같은 캐릭터였어요.”(스크린라이팅 트랙의 박진수 학생) “그렇다면 차라리 임신이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대사로 내뱉기보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임수정처럼 말을 많이 하면서 스스로 안정을 찾는 캐릭터가 맞지 않을까.” (김태용) 서사를 풀어나가는 방식인 ‘톤 앤드 매너’에 관한 이야기도 귀담아들을 만했다. 김태용 감독은 “임신이라는 주제를 얘기한다고 해서 영화의 분위기를 꼭 심각하게 보여줄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심각한 주제일수록 역으로 밝고 경쾌하게 풀어나갈 때 관객은 영화의 메시지를 더 잘 받아들일 것”이라며 “그러니까 이 이야기 역시 코믹하고 밝게 풀어나가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물론 학교 안에서 간단하게 찍은 습작용 영상이긴 하지만 연기연출도 김태용 감독의 예리한 눈을 피해갈 수 없었다. “주인공 여자가 슬퍼 보이나? 그게 배우의 역할이기도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감독의 연기연출이다.”(김태용) 김태용 감독은 여자가 휴대폰을 보는 시선 숏과 그 장면의 여자의 정면 숏이 180도 가상선을 어긴 것도 지적했다. 180도 가상선이란, 화면 내 대화 상대자와의 시선의 각도를 180도 가상선 내에 맞춘 다음 혼동이 생기지 않도록 선을 그어주는 것을 뜻한다. 김태용 감독의 조언은 세 학생에게, 그들이 만든 영상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되었다.
워크숍 중심의 융합 교육과정
‘프로젝트 기획 및 시나리오’ 수업은 이름대로 학 한기 동안 한편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기획한 아이템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게 수업의 목표이다. 디렉팅, 프로듀싱, 스크린라이팅 등 세 트랙에서 한명씩 모여 한조를 이룬다.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 건지 지도교수인 김태용 감독과 함께 먼저 논의한다(우정권, 김선아, 박기용 감독의 ‘프로젝트 기획 및 시나리오’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한다). 아이템이 결정되면 스크린라이팅 트랙의 학생이 시나리오를 쓰고, 시나리오가 나오면 디렉팅 트랙과 프로듀싱 트랙의 학생이 학교 안에서 간단한 영상을 찍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짧은 영상은 다시 김태용 감독의 감수를 거치는 식으로 진행된다.
이날 수업은 스크린라이팅 트랙의 박진수, 디렉팅 트랙의 김승민, 프로듀싱 트랙의 이임걸, 세 학생으로 구성된 프로젝트다. 이들은 첫주 수업 때 ‘살면서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로부터 작은 위로를 받는다’를 주제로 정했다. 이들에게 주어진 촬영 조건은 이렇다. 돈을 많이 들여서 찍지 않을 것, 학교 장비로 찍을 것, 러닝타임이 5분 내외의 짧은 영상일 것 등. 그게 오늘 공개된 임신한 여대생이 화장실 옆 칸의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김태용 감독은 이렇게 설명한다. “조별로 3주에 한번씩 진행되는 수업이다. 어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가고, 연출, 프로듀서, 시나리오 세 분야의 의견을 작품에 반영하는 것을 경험하는 게 이 수업의 목표다.”
작은 설정 하나하나까지 지도교수의 감수를 받는 만큼 학생들의 수업 만족도는 높다. 스크린라이팅 트랙의 박진수 학생은 “오늘 수업에서는 우리가 생각했던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임수정씨와 교수님께서 말씀주신 임수정씨의 모습이 달랐던 것 같다. 교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시나리오 작업에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며 “단순한 이론 수업이 아니라 우리가 구성한 기획 아이템, 직접 쓴 시나리오, 함께 만든 영상을 가지고 하는 수업이라 와닿는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프로듀싱 트랙의 이임걸 학생은 “오늘 수업을 통해 우리가 촬영한 영상이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 미흡한 점이 있었던 걸 알게 됐다”며 “주인공이 옆 칸의 여성과 휴지를 주고받는 부분이라든지, 휴대폰을 통해 남자친구에 대한 정보, 주인공 여자가 임신했다는 정보 등 여러 설정이 교수님 말씀처럼 설명이 안됐다. 교수님께서 세심하게 짚어주셔서 뭐가 잘못됐는지 쉽게 이해가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세심하고 예리한 김태용 감독과 여러모로 닮은 수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