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멜로영화이자 나를 놓고 연기한 첫 작품이다. 30대를 여는 첫 작품이기도 하고.” <용의자 X> 제작보고회 때 류승범은 유독 ‘처음’을 강조했다. 그 말은 무언가를 처음 경험했다는 뜻도 가지고 있겠지만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선언처럼 들리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용의자 X>에서 그가 연기한 ‘석고’는 그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류승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남자다. 언제나 에너지가 넘쳤던 전작과 달리 석고는 사회성이라고는 전혀 없이 오로지 수학에만 몰두하는 히키코모리 같은 남자다. 우연히 옆집에 사는 화선(이요원)이 전남편을 살해하는 것을 목격한 석고는 어떤 이유로 화선을 위한 완벽한 알리바이를 설계한다. 언제나 누군가가 낸 문제를 풀다가 처음으로 아무도 풀 수 없는 문제를 낸 석고는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류승범과 맞닿아 있는 인물이었다.
-얼마 전 <베를린> 촬영을 끝냈다. =지난해 10월부터 지금까지 쉼없이 달려왔다. 몇년 동안 써야 할 에너지가 한꺼번에 소진된 것 같다.
-제작보고회 때 “<용의자 X>는 첫 멜로영화”라고 말했다. 멜로라는 장르가 출연을 결정하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나보다. =큰 영향을 끼쳤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아주 파워풀한 뭔가가 강하게 와서 때렸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은 읽어봤나. =읽지 않았다.
-극중 석고는 수학 하나에만 매달리는 인물이다. 히키코모리 같은 면모가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석고라는 인물을 다 알 수 없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미묘한 생각도 들었다.
-미묘한 생각이라면. =위로해주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석고도 외로운 사람이지만 그런 인물을 연기하는 당신 역시 촬영 내내 외로웠을 것 같다.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가 있다. 연기를 한 뒤 오케이 사인을 기다리거나 모니터를 확인할 때 스탭들이 “석고, 불쌍해. 어떡해”라고 말하곤 했다. 그만큼 석고를 사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석고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는데, 내가 연기하고 있는 석고는 극중에서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게 참 재미있기도 하고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영화의 초반부, 화선이 사는 옆집에서 살인이 벌어지는 소리를 들은 뒤 옆집을 찾아가 벨을 누르는 장면이 있다. 그때 표정을 보니 벨을 누르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그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싶더라. =석고를 연기하면서 떨릴 때가 많았다. 그건 연기할 때 생기는 흔한 긴장감 같은 게 아니다. 오금이 저린다고 할까. 온몸이 팽창되는 느낌이랄까. 영화에서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이 시퀀스 역시 그런 떨림을 가지고 연기했다.
-이 시퀀스 촬영날, 현장 가는 길에 어떤 생각이 들던가. =찍기 전에 역시 이 소설을 리메이크한 니시타니 히로시 감독의 <용의자 X의 헌신>(2008)을 봤다. <용의자 X>의 석고에 해당하는 이시가미(쓰쓰미 신이치)가 화선에 해당하는 야스코(마쓰유키 야스코)의 범행을 확인한 뒤 짓는 표정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감독에게 준비할 시간을 좀더 달라고 할까. 순간적으로 판단한 건, 이 떨림이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일단 찍고 보자, 나중에 좋지 않으면 다시 판단할 시간을 달라고 하자. 그때 겪은 혼란감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장면이다. 연기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때 했던 연기는 어떤 에너지에 의해 나온 거다.
-대체로 에너지를 밖으로 분출했던 전작과 달리 <용의자 X>의 석고는 무척 왜소해 보였다. 그건 몸을 축 처져 보이게 하는 걸음걸이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촬영 들어가기 전에 감독님께서 좋은 선물을 주셨다. 잘 걷는 배우가 좋다, 화면에서 걸을 수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다며 석고라는 인물은 어떤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을지 고민을 해달라더라. 배우 생활을 하면서 집에서 인물의 걸음걸이를 연구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런 몸 상태라면 이런 걸음걸이를 습관적으로 보일 수 있겠다 싶은 움직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나. =영화 속 말투와 걸음걸이는 처음 해보는 것이었지만 그 모습이 그리 낯설지만은 않았다. 마치 나의 일부분인 것처럼.
-<용의자 X>는 미스터리 장르로 풀어가는 이야기다. 마지막 반전을 위해 초반부터 감정을 설득력있게 쌓아가는 게 중요했을 것 같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석고는 자신의 행동이 연기임을 알고 있는 캐릭터다. 살인사건의 알리바이가 전부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으니까. 그게 이번 작업의 키워드였다. 그래서 촬영 내내 석고의 진짜 모습을 연기해야 하는 건지, 석고가 연기하는 모습을 연기해야 하는 건지 많이 혼란스러웠다. 연기를 하면서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없으니까. 반대로 자기 확신을 가지려면 객관적이어야 했는데, 또 무조건 객관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나를 억누를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그 사이에서 적절한 포인트를 잡는 게 어려웠던 것 같다.
-이번 영화는 류승범의 개인적인 성향을 최대한 떨쳐내려 한 작업이기도 했다고. =콘티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했다. 이야기가 미스터리 구조이다 보니 연출 동선 안에서 움직여야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으니까. 그동안은 캐릭터에 나를 드러내는 작업을 많이 해왔다. 그러다보니 나를 제어해야 하는 압박감이 들어오면 스스로 그걸 못 견뎌했고, 이겨내기 어려워했던 적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 영화는 그런 압박감과 통제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했다.
-제작보고회 때 이 영화를 “30대의 첫 작품”이라고 얘기했다. 여러 의미에서 류승범에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시간이 흐른다는 건 예민한 일인가보다. =그렇다고 20대, 30대 같은 숫자 단위로 시간을 인식하는 건 아니다. 누구나 그렇듯 일상의 어떤 사건을 겪을 때마다 반응을 보이잖아. 그런데 비슷한 사건이라도 어릴 때 했던 반응과 지금 보이는 반응이 다르더라. 그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내가 10년 뒤인 마흔살에는 어디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역시 똑같은 사건이라도 그때는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게 궁금해지더라. 그러다보니 시간이 막연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필모그래피를 위해 영화를 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무언가를 내 몸에 유용하게 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 것들을 가슴에 새기는 것 같다.
-최근 패션쇼 행사를 비롯해 미디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 =물론 그런 의도도 있다.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무언가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다만, 분별을 하고 싶다. 예전에는 ‘그것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제는 내 미래와 인생을 위해 분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책에서 공감을 한 구절이 있다. ‘인간은 30대까지 환경의 동물이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는지 등 여러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소리다. ‘40대가 되면 인간은 자아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50대는 무언가에 의해 끌려가는 시기고….’ 그 말이 충격적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구나. 앞으로 무언가에 의해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내 생각과 행동을 의식의 영역에서 스스로 분별해야겠다. 그래야 지금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과거와 다르게 변화하는 자신을 바라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여행에 비유할 수도 있겠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에 처음 가면 모든 게 낯설잖나. 그런데 두번, 세번 계속 가다보면 그곳이 내 동네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나. 나중에는 그 동네가 익숙해지고 그리워지기도 하고. 내가 그 동네에 익숙해진다고 해서 내가 그 동네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것처럼 나의 변화를 통해 어쩔 수 없이 주제를 파악하게 되는 것 같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됐고. 이 스텝을 내딛었을 때 또 다른 스텝이 따라오는 것처럼 이런 변화 역시 겪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오는 또 다른 류승범의 모습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그 점에서 사람의 변화, 확장은 중요한 것 같다.
-<용의자 X>와 함께 류승범의 30대를 연 작품은 내년 여름에 개봉예정인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이다. 극중 북한 최고 요원 표종성(하정우)을 감시하는 냉혹한 도명수 역을 맡았는데. =권력, 검은 돈, 섹스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이 들어간 인물이다. 어떤 인물인가보다 영화에서 가지는 역할이 중요한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선과 악이 혼돈된 이 영화에서 도명수는 한마디로 ‘악의 축’이다.
-이후 계획이 궁금하다. =고민되는 시나리오는 있는데 에너지가 너무 소모돼서 선뜻 결정하기가 두렵다. 당분간 쉬면서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씨네21> SNS를 통해 받은 독자들의 질문
-<용의자 X>는 30대를 시작하는 작품인데요. 20대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성장통을 겪은 전작은 무엇이고, 어떤 성장통이 있었는지 궁금해요._홍피디(미투데이) =되돌아보면 저는 계속 성장해왔어요. 매 작품, 매 삶이 성장통인 것 같아요. 넘어지고, 실수하고, 그러다가 다시 일어나고, 또 자빠지고. 제 삶은 그 과정의 연속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계속 그러고 있고.
-<용의자 X> 공약 하나만 해주세요. 몇 백만명 이상 관람하면 XXX 하겠다~!!!_화창한태풍(미투데이) =지금까지 스코어를 한번도 맞히지 못했어요. 공약은 지켜야 하잖아요. 공약이라기보다, 촬영현장에서도 얘기하긴 했는데 300만명 정도 들 것 같아요. 그 정도만 들면 참 행복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