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꽤 황당한 뉴스가 타전되었다. 미국의 한 보안업체가 좀비 대비 훈련을 실제로 시행한다는 뉴스였다. 이 좀비 대비 훈련에는 미군과 경찰, 의료진, 연방 공무원 등 1천여명이 참가하며, 가짜 좀비들을 사람들 사이로 투입한다고 한다. 놀라워라, 국가 공권력이 좀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실토라도 하는 것일까.
미국의 좀비 사랑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 시카고나 시애틀 같은 미국 대도시에선 아예 수천명이 모여 좀비 퍼레이드를 연다. 각기 좀비로 분장해 수천명이 흐느적흐느적 도시를 행진하는 것이다. 이 축제는 유럽으로도 수출돼 점점 규모가 늘어나는 양상인데, 영국에서는 ‘좀비 오디션’도 등장했다.
하긴 그뿐이랴. 조지 로메로의 ‘시체 4부작’에서부터 최근 개봉한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 미드 <워킹 데드> 등 영화, 드라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좀비 관련 게임들이 증명하듯 이미 매스 미디어는 좀비에게 점령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이 넘쳐나는 좀비 이미지들은 미디어를 넘어 이제 생활 양식에서도 실제화되고 있다. 좀비PC, 좀비폰, 좀비 꿀벌, 좀비 마약 등 실생활의 언어들까지 내밀하게 잠식해버렸다. 한국 인터넷 포털의 정치 관련 기사 댓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좀비’가 아니던가.
부두교의 의례로, 아라비아의 구울 전설로, 중국의 강시 민담으로 내려오던 흐릿한 언데드의 이미지는 어느덧 지구촌 세계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쩌다 우리는 이 살아 있는 끔찍한 시체들에 둘러싸이게 된 것일까?
문명비판론적 시각을 포함해 좀비의 일상화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좀비영화의 아버지 조지 로메로의 이 말은 핵심을 짚고 있다. “좀비는 현존하는 재난을 말하는 것으로, 좀비 스토리는 사람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유없이 사람들을 물어뜯거나, 신체를 훼손하거나, 혹은 얼마 전 한국사회를 떨게 했던 묻지마 칼부림 용의자들 같은 특정의 공포스러운 범죄자들을 통해 좀비 종말 시나리오를 떠올리는 건 다소 안이한 분석이다. 오히려 그것은 울리히 벡이 우리에게 경고한 “위험사회”의 풍경과 닮아 있다.
울리히 벡은 말한다. “도처에 잠복해 있다 예측도 없이 튀어나오는 위험, 그 위험에 대한 불안이 현대사회를 다른 시대와 구별짓는다.” 그 불안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증폭된다. 고도로 집적화되고 분화되었으며 관료 집단들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시민들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상황들은 거의 없다. 좀비들은 군사 시설에서, 공장 사육되는 동물들에게 감염된 분노 바이러스로부터, 초국적 제약 회사의 실험실에서, 특정의 주파수에서 탄생한다. 시민들이 통제할 수 없는 위험들은 시한폭탄처럼 산재해 있고, 사회가 더이상 시민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불신과 재앙의 연기가 도시에 자욱하다.
좀비가 창궐하는 이 시대는 말하자면, 삶의 조건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기꺼이 좀비에 빗대 조롱하고 집단 살육하는 자기 역설의 시대인 것이다. 사실, 지금 이 시대의 우리 대부분은 좀비처럼 그렇게 걸어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