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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스토리-텔링] 그녀는 복수를 했는데 그는 구원을 얻었네
신형철 2012-10-10

<피에타>에서 ‘복수’와 ‘구원’의 문제

* 어떤 분들에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 정보들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을 갖고 있지 않은 나에게도 김기덕의 영화에는 이상하게 느껴지는 대목들이 늘 있다. 한 가지만 얘기해 보라고 하면 배우들이 대사를 처리하는 방법을 말해야 하겠다. 그들은 너무나 전형적인 억양으로, 너무나 기계적으로 말한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처리하는 방식과 정반대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이것은 영화일 뿐이라는 사실을 브레히트식으로 재인식하게 해주는 그런 대목들이 왜 있어야만 하는 것인지 나는 늘 의아했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여러 번 되풀이 찍을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이 점이 늘 안타까웠던 것은 그런 것들에 의해 완성도가 훼손되는 것이 억울할 정도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훌륭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그의 영화가 자주 보여주는 경이로운 이미지들을 찬미하지만 그 이미지들이 시각뿐만 아니라 통각까지 압도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게도, 서사의 엄호 덕분이지 않은가. 그렇다는 것을 김기덕의 영화만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그의 열여덟 번째 영화를 봤다. 일단은 복수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였다.

복수의 서사란 무엇인가 - 고통의 등가교환이라는 문제

복수의 서사는 대체로 근대적 형법제도 바깥에서 구축된다. 자력구제로서의 사적 복수. 그런 복수들은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취지로 감행된다.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요약되는 원칙을 따라서 말이다. 백과사전을 뒤져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원칙을 그리스어로는 ‘탈리오 법칙’(lex talionis), 현대 영어로는 ‘탤리언’(talion)이라고 부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관용구의 근원을 흔히 함무라비 법전에서 찾지만 거기까지 올라갈 것도 없이 구약에도 동일한 표현이 세 차례(창세기, 레위기, 신명기)나 나온다. 당시에는 이것이 보편적인 복수의 논리였다는 뜻이다. “당신들은 이런 일에 동정을 베풀어서는 안됩니다. 목숨에는 목숨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갚으십시오.”(신명기 19:21, 대한성서공회 표준새번역) 그런데 문제는 내가 입은 고통을 가해자에게 정확히 되돌려주는 일이 생각만큼 간단하지가 않다는 데 있다. ‘눈’이나 ‘이’는 뽑으면 된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은 어떻게 정확히 되돌려줄 수 있을까. 그런 고통은 계량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독창적인 복수의 서사를 만들고 싶다면 바로 이 난관을 창조적으로 돌파해 나가야 한다. <악마를 보았다>(이하 <악마>, 2010)의 경우는 어떤가. 김수현(이병헌)은 자신의 약혼자를 강간 살해한 장경철(최민식)에게 전대미문의 복수를 감행한다. 죽기 직전까지 고통을 준 다음 풀어주고 다시 붙잡는 일을 무한히 반복하기. 그야말로 ‘무한히’ 해야 할 일인데, 피해자의 고통은 ‘계산’될 수 없는 것이므로 끝내 ‘결산’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복수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언뜻 보면 장경철의 역공이 원인인 것 같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장경철이 육체적인 고통은 느껴도 정신적인 고통은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다. 눈알을 파내고 입을 찢어도 그가 느끼는 고통은 의과(醫科)적인 것에 불과하다. 육체를 제아무리 고문해도 이 가해자가 느끼는 고통은 피해자의 영혼을 조각낸 그 정신적 고통과 ‘등가교환’되지 않는다. 복수가 불가능한 상대여서 그는 ‘악마’다. 그래서 김수현은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지만 그것은 복수의 대상을 바꿔버린 것에 불과할 뿐이며 남은 것은 더 파괴된 김수현 자신의 영혼이다.

<악마>보다 시기적으로 앞서지만 복수의 논리학이라는 측면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바로 <올드보이>(2003)다. 오대수(최민식)가 자신을 15년 동안 감금한 이우진(유지태)에게 복수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오랫동안 공들여 디자인한 복수를 실행하는 이야기다. 이 복수에 그토록 오랜 준비 기간이 필요했던 이유는 바로 <악마>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즉 ‘고통의 등가교환’을 정확히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오대수를 딸과 근친상간하게 만들어야 한다. 둘째, 그 사실을 딸에게 폭로해야 한다. 셋째, 그 충격으로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 복수는 성공했는가? 역시 실패했다. 1단계에서 2단계로 넘어가는 찰나에 오대수가 자신의 혀를 잘랐고, 이에 이우진이 2단계로의 진행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오대수의 부성애에 감동했기 때문이 아니다. 누나를 죽게 한 것이 자기라는 진실을 이우진이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오대수는 혀를 잘랐지만 이우진은 누나의 손을 놓았었으니까. 그러니 그가 죽여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다.

요컨대 두 영화 모두 복수에 실패했다. 하나는 방법이 틀렸고, 다른 하나는 대상이 틀렸다. 물론 서사 내에서의 이 실패가 서사 자체의 실패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애초부터 실패담으로 구축된 것이고, 그 실패의 불가피함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데 그 가치가 있는 서사들이기 때문이다. 두 영화의 독창성은 바로 그 실패의 독창성에서 나온다. 실패의 불가피함을 성찰하면서, 고통, 증오, 환멸 등과 같은 인간 감정의 논리를, 이야기라는 형식이 아니면 도저히 전달할 수 없을 정도의 깊이로 보여준다. <피에타>는 어떤가. 이 영화도 역시 복수의 서사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이 영화는 앞의 두 영화가 도달하지 못한 어떤 지점까지 또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피에타>가 앞의 두 영화가 실패한 것, 즉 고통의 등가교환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이미 말했듯이 복수의 성공/실패 여부는 서사 자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이 복수의 서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도약해서 앞의 두 영화가 두드리지 않은 문까지 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구원이라는 문이다.

우선, ‘복수의 서사’로서의 <피에타>

먼저 이 영화가 ‘복수의 서사’일 수 있다면 어째서 그러한지, 그리고 앞의 두 영화와는 달리 어떻게 고통의 등가교환이라는 목표를 성취했는지를 살피자. 김기덕 감독 자신은 이 영화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삶 자체가 돈 때문에 파괴되어가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돈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 대한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다.”(<씨네21> 872호) 그는 이를 다시 “극단적 자본주의에 관한 영화”라는 말로 요약했다. 우리가 본 영화는 과연 그런 영화다. 흔히 ‘청계천 공구상가’라 불리는 종로구 장사동 지역을 배경으로, 자본주의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있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고리 사채를 쓰고는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끊는 장면들을 이 영화는 관객의 눈앞에 들이민다. 그러나 ‘극단적 자본주의’라는 말은 이 영화의 서사적 박력의 원인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서사’라는 말은 성립되기 어렵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모든 서사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서사일 것이다. 관건은 역시 아들을 잃은 미선(조민수)의 복수담에 있다.

복수의 대상인 이강도(이정진)는 어떤 인물인가. 다른 인물들이 그를 가리켜 악마라고 부르지만 이강도는 <악마>의 장경철과는 다르다. 장경철이 악마인 이유는 그에게 어떠한 결핍도 없기 때문이지만(<악마>는 장경철의 과거에 대해 묻지 않는다), 이강도에게는 그것이 있다. 그것은 모성에 대한 결핍이다. 그러니 <악마>의 경우보다는 한결 더 수월할 수 있다. 이강도가 그 결핍을 스스로 깨닫고 있는지 어떤지는 불확실하다.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칼을, 얼굴은 흐릿하고 풍만한 가슴만 강조돼 있는 여성의 초상화에 꽂아놓는 방식으로 보관한다. 칼을 꽂을 때마다 그는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떠올렸을까. 분명한 것은 그가 여성에 대한 증오를, 어쩌면 자기도 그 이유를 모르는 채로, 확고히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여성은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의 성욕은 몽정과 자위가 뒤섞인 형태로만 해소되고,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내의 아내가 스스로 옷을 벗었을 때 그 행위는 이강도에게 유혹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 킨다. 이 증오가 그의 결핍을 증명한다.

미선의 복수는 바로 이 결핍을 겨냥했다. 그리고 그 위에다가 <올드보이>가 이미 보여준 방법론으로 복수를 디자인했다. 정확히 동일한 상황을 설계해서 그곳으로 초대하기. 그녀 자신은 아들을 잃었으니, 고통의 등가교환을 위해서, 이강도는 어머니를 잃어야 한다. 그러나 이강도에게는 엄마가 없으니 일단 엄마를 제공했다가 다시 박탈하면 될 것이다. 산술적으로는 0에 1을 더했다가 다시 1을 빼는 것이지만 어머니가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는 경우라면 그 계산의 결과는 결코 0이 될 수 없을 것이고 결국 이강도의 영혼을 파괴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올드보이>에서 15년 이상이 걸린 그 과정을 며칠 만에 성취해야 한다는 데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서사의 시간은 관객이 갖고 있는 시계보다 빨리 간다. 물론 이강도가 자신의 허벅지 살을 잘라서 미선에게 먹이고 그녀에게 강간을 시도했다가 포기하는 장면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존재의 본질(그런 게 있다면)은 그와 같은 ‘순간적인’ 시험을 통과하는 데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이 증명해주는 사랑의 지구력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던가. 모자의 첫 외출 장면에서 이강도의 변한 얼굴이 당황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래서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면서 이 결함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이 서사의 초점화자의 지위가 ‘복수의 대상’인 이강도가 아니라 ‘복수의 주체’인 미선에게로 확실히 이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복수의 주체가 놓여 있는 위치가 <악마>나 <올드보이>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악마>의 김수현에게 필요한 것은 지치지 않는 증오의 에너지였고 <올드보이>의 이우진에게 필요한 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냉철한 판단력이었다. 반면에 미선은 자기 자신을 복수라는 제의의 희생양으로 바쳐야 한다. 더 끔찍한 것은, 목숨을 바치기 이전에, 이강도에게 그야말로 엄마가 되는 데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죽게 만든 괴물을 사랑하는 척해야 한다. 괴물의 살을 씹어야 하고 괴물의 성기를 부여잡아야 한다. 그야말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윤리의 격률을 본의 아니게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고 이것이야말로 미선에게는 끔찍한 것이다. (조민수의 연기는 이 끔찍함을 충분히 느끼게 한다.) 이 모든 것을 견뎌냈기 때문에 그녀의 복수는 여하튼 진행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구원의 서사’로서의 <피에타>

그러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이 영화는 복수담의 길과는 다른 길을 낸다. 미선은 이강도와 함께 지내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균열의 출발점은 미선이 미처 디자인하지 않은 돌발적인 사건에 있다. 이강도가 고층에서 떠밀어 불구가 된 남자를 ‘모자’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미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이강도는 목숨을 걸고 어머니를 지켜낸다. 미선이 강도를 처음으로 안아주는 순간이 바로 여기다. 이 장면에서 강도와 미선은 둘 다 (한 사람은 의식적으로, 다른 한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진심으로 행동한다. 이어지는 것은 이강도의 몽정/자위 장면이다. 미선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의 결핍을 온전히 실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강도의 성기를 잡고 그의 몽정/자위를 도와준다. 자신의 손에 묻은 정액을 보며 그녀는 운다. 이것은 그녀가 죽은 아들이 아니라 이강도를 위해 흘린 최초의 눈물이다. 다음 장면에서 그녀가 그 정액을 혐오스럽다는 듯이 씻어내면서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기는 하지만, 그녀는 문득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분열을 자각한다.

미선은 아들의 생일을 기점으로 복수를 서두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복수에의 의지가 약화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일파티를 한 날 밤에 강도가 그녀의 침대로 들어와 함께 자려고 하자 미선이 그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그래서 필요했다. 그녀는 지금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균열은 끝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그 순간에 다음과 같은 대사로 확연히 표명된다. “상구야 미안해. 이럴 마음이 아니었는데. 놈도 불쌍해. 강도 불쌍해.” 이 순간에 미선의 임박한 죽음은 ‘저주를 내리소서’에서 ‘자비를 베푸소서’로 그 의미가 이동한다. 바로 그때, 뛰어내리기 직전 미선의 등 뒤에 노파가 나타나 미선을 떠밀려고 할 때, 우리가 끔찍한 기분이 되고 마는 것은 ‘복수에서 구원으로’ 이동하는 중인 이 죽음의 의미가 무화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처리됐다면 그 순간 이 영화의 시선은 신의 시선이 되었을 것이고, 이 영화는 결국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모든 몸부림 앞에 신이 던지는 끔찍한 농담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결국 미선의 균열은 이 복수의 서사에 균열을 냈다. 가장 처절한 복수를 위해서 어머니가 되어주기로 한 것이지만 그 역할극 속에서 그녀는 정말로 (어느 정도는) 강도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복수가 낳을 결과를 계산하는 데도 실패했다. 사라진 미선을 찾아 헤매면서 강도는 자신이 파멸시킨 이들의 고통을 순례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악행을 복습하고 선과 악에 대한 최초의 자각에 도달하게 된다. 마침내 미선이 죽고 난 뒤 강도가 이 모든 것이 미선의 계획된 복수임을 깨달은 후에도 더 끔찍한 지옥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무덤 속에 나란히 누운 세 사람을 보여주는 장면이 말하고 있는 대로, 비로소 온전한 평온을 얻게 되는 것도 그가 앞서 말한 저 순례의 과정을 이미 겪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미선의 복수는 살아 있는 강도를 죽인 것이 아니라 이미 죽어 있던 강도를 최초로 살리는 결과를 낳았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구원한 셈이다. 김기덕의 어떤 영화들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고 당시에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던 이 설정은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표현을 얻는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예수 이후의 윤리학이다. 그 프레임 안에서 보면 이렇다. 피해자가 복수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그 고리 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다. 복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 영혼의 도약이 바로 사랑이다. 구약의 메시지를 신약은 이렇게 뒤집는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복음 5:38~39) 미선의 죽음은 애초에 복수를 위한 것이었으되 또 다른 복수를 낳지 않고 복수의 연쇄 고리를 끊어버렸다. 덕분에 죽어 있던 강도는 처음으로 태어났고, 이제야 스스로 죽을 수 있게 되었다. 미선의 죽음이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면, 강도의 죽음도 단순한 속죄가 아니다. 강도의 죽음은 미선이 반복했던 예수의 죽음을 다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가장 악마적인 피를 제 몸에 모두 묻힌 채 이루어진 대속(代贖)의 죽음이기도 할 것이다. 생일 케이크에는 32개의 초가 꽂혀 있었으니 그는 우리 나이로 서른세살일 것이다. 예수가 죽은 나이와 같다.

적어도 내가 본 범위 안에서 김기덕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구원(Salvation)이고, 그를 이해하는 데 가장 유용할 방법론은 구원론(Soteriology)인 것 같다. 그의 어떤 영화들에는 가장 중요한 장면과 가장 끔찍한 장면과 가장 숭고한 장면이 일치하는 기묘한 순간, 김기덕식 성(聖)삼위일체가 구현되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 마술적인 장면들이 나온다. 가장 중요하고 가장 끔찍하며 가장 숭고하기까지 한 것이 있는가? 그런 것이라면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비견할 만한 것이 있을까. 돌이켜보면 김기덕의 영화는 가장 비천한 곳에서, 가장 참혹한 자기 처벌의 방법으로, 가장 추악한 것들을 대속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김기덕 영화의 모든 주인공이 예수를 반복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 어떤 신앙도 갖고 있지 않은 나는, <피에타>의 저 ‘중요하고 끔찍하고 숭고한’ 장면이 안겨준 그 견디기 어려운 감정을 어떻게 달리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김기덕은 완벽하지 않다. 그렇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들은 그들이 각자 도달한 가장 높은 곳에서 서로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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