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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낳은 땅을 보라

사회적 문제 건드린 중국 에밀리 탕부터 메콩강 주변을 시처럼 담아내는 타이 아핏차퐁 위라세타쿤까지

우리의 일상은 어디서부터 흔들리는가

변방의 영화가 아니라 지역의 영화들을 모았다. 그 지역의 사람, 정치, 삶을 보여줄 수 있는 영화들이다. 메콩강변의 호텔을 떠도는 유령에 관한 전설부터 아르헨티나의 서부극 주인공과 3•11 대지진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땅의 다양한 이야기가 여기 있다.

사랑의 대역 All Apologies 감독 에밀리 탕 / 제작국가 중국 / 상영시간 88분 / 섹션 아시아영화의 창

건설노동자인 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다. 아들을 좋은 초등학교에 보내려고 아침부터 일찍 입학수속을 끝낸 그날, 옆집 남자의 트럭에 올라탄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는다. 하지만 옆집 남자는 한쪽 다리를 잃었을 뿐 살아 있다. 첸은 아들의 죽음이 가져온 슬픔을 감당하려 한다. 하지만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 때문에 아내가 불임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첸은 더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음에 절망한다. 술로 괴로움을 달래던 어느 날 밤, 첸은 옆집 남자의 아내를 강간하고는 말한다. 보상금은 필요없으니 아들을 낳아달라고. 보상금과 남편의 치료비를 걱정하던 여자는 곧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남편이 일으킨 사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그녀는 결국 첸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사랑의 대역>은 거래해서는 안될 거래를 한다는 점에서 리유 감독의 <로스트 인 베이징>을 연상할 법한 작품이다. 강간으로 인한 여자의 임신, 이 기회에 자식을 얻으려는 가해자 남자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노리는 여자의 남편 등의 구성도 그렇다. 하지만 염치가 사라진 시대에 베이징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의 모습을 냉소와 조소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로스트 인 베이징>과 달리 <사랑의 대역>은 불가피한 선택의 연속과 그로 인한 비극을 중계한다. 베이징에 거처를 마련한 두 남녀는 겉보기에는 부부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열달을 보낸다. 이들 사이에서는 흔히 기대할 법한 로맨스도 일어나지 않는다. 여자는 여자대로 남겨둔 남편과 아이를 그리워한다. 월급을 받지 못한 채, 거리로 내몰릴 처지에 놓인 첸의 현실 또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산달이 가까워올 즈음 이들의 아내와 남편이 베이징을 찾아오고, 4명의 부부는 또 다른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 놓인다. 용서를 구하고 보상을 바라는 일이 가져온 파국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진다. 감독인 에밀리 탕은 인물들의 선택에서 가치판단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다. 누가 그들을 선택의 기로로 내몰았는가를 묻는 영화는 도덕적인 판단 이전에 중국사회의 쓸쓸한 단면을 먼저 드러내 보인다.

소금 Salt 감독 디에고 루히에르 / 제작국가 칠레, 아르헨티나 / 상영시간 114분 / 섹션 월드시네마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칠레에서 영상물 제작을 하고 있는 감독이 장편 서부극을 만드니 이런 영화가 나온다. 주인공의 이름 세르히오(Sergio)에서부터 세르지오 레오네라는 이름이 떠오른다. 그의 직업은 영화감독이다. 서부극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에 제작자들을 찾아다니지만 그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상심에 빠진 세르히오는 영감을 얻기 위해 칠레의 사막으로 떠나게 되는데 그때 별안간 돌아온 ‘디에고’라는 인물로 오인받게 된다. 디에고와 빅터가 대립하는 이 마을. 그러니까 세르히오는 자기가 만들고 싶었던 영화 속 어느 장르의 분위기로 들어오고 만 것이다. 믿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실제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고 <소금>의 감독은 밝힌다. 서부극을 만들고 싶지만 만들지 못하는 감독이 서부극의 상황으로 들어가 그 주인공이 되는 영화가 실제 사건에 기초해 있다면 놀라운 일이겠지만 그게 무언가 사실과는 무관한 전략적 허풍이라 해도 나쁠 건 없다. <소금>은 간단하게 영화와 영화 바깥으로 나뉘지 않고 서로 서서히 겹쳐가며 경계를 무너뜨리는 쪽을 택한다. 세르지오 레오네가 만든 일련의 서부극들은 ‘이름 없는 사나이’ 시리즈라고 불렸다. <소금>은 ‘이름 바뀐 사나이’에 관한 서부극이라 해도 좋겠다.

메콩호텔 Mekong Hotel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 제작국가 타이, 영국 / 상영시간 61분 / 섹션 아시아영화의 창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엑스터시 가든>이라는 장편영화를 준비 중인가 보다. 그 영화를 메콩강 주변에 위치한 메콩호텔이라는 곳에서 촬영하고 있는 모양이다. 한 작품 안에서 다른 작품을 발전시키는 것이 그의 영화 만들기의 특징 중 하나이니 <메콩호텔>이 <엑스터시 가든> 어딘가에서 시작된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간결한 듯 보이는 영화로 순식간에 현실과 환상의 구분을 넘어 기묘한 세계를 만드는 것은 매번 놀라운 일이다. 감독과 기타리스트가 메콩호텔에 앉아 있다. 두 사람의 대화. “내가 어제 스페인 스타일로 쳤던가?”라고 기타리스트가 물으면 감독 위라세타쿤은 “응, 그리고 블루스로도”라고 대답한다. 기타리스트가 기타를 치기 시작하면 이제 그들은 화면에서 사라지고 위라세타쿤 영화에 늘 등장하는 배우가 나온다. 그렇다면 이건 그들에 관한 이야기일까라고 얼핏 생각할 무렵 영화는 또 다른 극 안으로 흘러들어간다. 사람의 내장을 파먹는 여자 귀신 풉에 대한 이야기. 기타 소리가 시종일관 흐르는 반면 무언가 분명치 않은 방식으로 풉에 관한 한편의 극영화도 함께 흐른다. 한 시간 남짓 되는 이 영화는 해지는 메콩강 주변에 이승과 저승의 시간을 뿌려놓는 마법을 펼친다.

시네마 Filmistaan 감독 니틴 카카르 / 제작국가 인도 / 상영시간 117분 / 섹션 뉴 커런츠

넉살이 좋은 데다 무한정으로 낙천적이기까지 한 이 남자 써니는 인도의 유명 영화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다. 이런저런 오디션도 수없이 다녀본다. 하지만 전부 낙방. 그때 돈에 쪼들리는 그를 위해 친구가 조감독 자리 하나를 소개해준다. 하지만 써니가 합류한 영화팀은 하필 다큐멘터리팀인 데다 그들은 곧 인도와 파키스탄의 접경 지역 라자스탄으로 가야만 한다. 마침내 큰일이 일어나고야 만다. 파키스탄 반정부군이 써니를 미국인으로 오인하여 납치해간다. 물론 그들은 협상에 필요없는 사람을 잡아왔음을 곧 알게 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써니를 외진 마을에 감금한다.

이야기로만 전하면 이 영화는 어둡다. 그렇다면 <시네마>는 무언가 점점 더 비관의 세계로 빠져드는 영화인 것일까. 이때 예상과는 다른 재미들이 등장한다. 우선 주인공의 성격이 쾌활하다. 그의 쾌활함이 다른 사람들을 전염시킨다. 혹은 그의 쾌활함이 발리우드 시네마를 연상시킨다. 발리우드 방식의 춤과 노래 장면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그 오락적 에너지를 흡수해내고 있다. 동시에 이 영화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정치사적 화해까지도 촉구하고 있다. 그 정치적 화해 혹은 치유의 징검다리가 이토록 즐거운 ‘시네마’면 어떻겠느냐고 묻고 있다.

빈집 The Empty Home 감독 누르벡 에겐 / 제작국가 러시아, 키르기스스탄, 프랑스 / 상영시간 98분 / 섹션 아시아영화의 창

아셀은 키르기스스탄에 사는 열아홉 소녀다. 어머니는 일찍 여의었고 늘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과 한집에 산다. 아셀은 곧 마을의 지도자인 술탄과 사랑없는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 결혼은 일종의 거래다. 그녀는 결혼을 통해 경제적 풍요를 누릴 것이고, 술탄은 대를 이을 자식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아셀에겐 남자친구가 있다. 뱃속엔 남자친구의 아이도 자라고 있다. 그리고 술탄과의 결혼식 첫날 밤. 아셀은 모두를 뒤로하고 마을을 뜬다. 도착한 곳은 모스크바. 아셀은 낙태 수술을 부탁한 의사에게서 한 여인을 소개받는다. 건강한 아기를 갖길 원하는 프랑스인 여자다. 그러나 여자는 정신상태가 온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셀은 그녀를 위해 아이를 낳기로 한다. <빈집>은 악착같이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려나가는 소녀의 삶을 다큐멘터리적 시선으로 담아낸다. 국가도, 부모도, 친구도 심지어 법조차도 보호막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 한 소녀가 서 있지만, 영화는 함부로 소녀를 동정하지 않는다. 소녀의 입을 빌려 발언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소녀의 기구한 운명을 따라갈 뿐이다. 끝끝내 소녀에게 희망을 허락지 않는 이 영화가 소름끼치도록 잔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르벡 에겐 감독은 그것이 키르기스스탄 소녀가 처한 현실이라고 말하려 한 게 아닐까

온화한 일상 Odayaka 감독 우치다 노부테루 / 제작국가 일본 / 상영시간 102분 / 섹션 아시아영화의 창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선 3•11 대지진 이후 일본인들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우치다 노보테루 감독의 <온화한 일상>도 그중 하나다. 영화는 지진으로 인한 급격한 변화와 그들의 불안을 두 여자 사에코와 유카코를 통해 보여준다. 지진으로 고향집과 연락이 두절되어 걱정에 휩싸인 밤, 사에코는 남편에게서 갑작스런 이혼 통보를 받게 된다. 남편이 떠나버린 집에서 어린 딸을 홀로 챙기게 된 사에코는 인터넷을 통해 여러 정보들을 보면서 혼란에 휩싸인다. 이는 그녀의 옆집에 사는 유카코 역시 마찬가지다. 인터넷을 통해 TV와 신문이 말하는 정보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유카코는 안전지역으로의 이사를 고려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런 유카코를 유난스럽다고 생각할 뿐이다. 한편 방사능 측정기를 사들고 여느 때처럼 딸아이의 유치원을 방문한 사에코. 그녀는 방사능 수치가 생각보다 높게 나오자 유치원에 항의하지만 그 상황을 지켜보는 다른 학부모들은 사에코가 불안을 조장한다며 그녀에게 폭언을 퍼붓는다. 아무도 제대로 된 진실을 마주보려 하지 않는 영화 속 상황은 지금 일본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인들이 느끼는 불안을 사회는 제대로 감싸고 있는지, 작품은 날카로운 질문과 선언을 동시에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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