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분위기라는 게 실제로 있는지 몰라도 이번 추석처럼 고요하긴 오랜만이다. 추석이라고 해서 상점가에서 캐럴 대신 민요가 울릴 리 없고 송편과 한과를 주렁주렁 매단 트리가 있을 리 없지만, 뭔가 떠들썩한 분위기가 실종된 것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한반도를 연이어 강타한 태풍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배 한개에 5천원!), 개천절까지 징검다리 연휴가 가능하긴 하지만 대부분이 사흘짜리 짧은 연휴만 지내야 한다는 상황 때문이기도 할 터이며(추석이 일요일이라니!), MB 정부 5년차를 맞아 얇디얇아진 지갑 탓도 있을 것이다(경제대통령이라고?).
등골이 휘고 눈이 핑핑 돌 정도로 일해도 ‘저녁이 있는 삶’조차 누리지 못하는데 연휴마저 짧아 짜증나는 여러분께 정말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씨네21>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합본호 휴가’를 갖는다. 소중한 재충전의 시간인 셈이다. 하지만 죄송스러워도 너~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어 통 크게 합본호를 준비했다. 이를테면 독자 여러분을 위해 마련한 ‘추석선물세트’랄까. 시시한 알맹이를 거창한 포장재로 감싸 우롱당한 기분을 주는 대부분의 추석선물세트와 달리 이번 <씨네21> 추석 합본호는 그 어느 때보다 알차고 튼실하며 차진 내용물로 그득하다고 자부한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해외파’인 박찬욱, 김지운, 봉준호 감독과의 단독 인터뷰다. 할리우드와 유럽에서 새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이들 세 감독의 소식은 그동안 간간이 들려왔지만 사실 정확히 감을 잡기는 힘들었다. 그러면서 궁금증만 증폭돼왔는데 내년 개봉까지 기다리기도 지쳤고
세 감독의 근황도 알고 싶어서 주성철 기자가 그들과 인터뷰를 가졌다. 미국에 체류 중인 김지운 감독은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충실한 답변으로 우리를 감동시켰고, 국내에서 새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는 박찬욱, 봉준호 감독도 바쁜 시간을 어렵게 쪼개줬다. 미리 인터뷰를 읽어본 입장에서 말한다면, 궁금증은 훨씬 더 커지지만 그들 영화에 관해 윤곽을 어느 정도 잡을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여러분도 필독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김혜리가 만난 이병헌’도 흥미롭다. 인터뷰이와의 공감 속에서 아주 세밀한 지점까지 묻고 또 묻는 김혜리와 이병헌의 성실한 답변이 흔치 않은 쾌감을 준다. 어떤 대목에서는 이병헌의 근사한 저음 톤의 목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듯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영화 속 그곳’에 관한 6편의 에세이도 신경 쓴 특집이다. 글맛이 쏠쏠한 필자들의 에세이를 보고 있노라면 훌빈한 지갑을 탁탁 털어서라도 그곳으로 떠나고 싶어진다(그래도 주문진 정도는 갈 수 있겠지). 리암 니슨과 우디 앨런에 관한 기사도 권해드리며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니 미리 <씨네21>이 추천하는 30편의 프리뷰를 읽고 예매 전쟁에 임하시길 바란다.
부디 귀성 잘하셔서 풍성한 음식과 가족과의 화목한 대화를 즐기시라. 가족 사이에 분란이 있을 수 있으니 대선 후보에 관한 품평은 적당히 하시고. 여러분 모두 즐거운 한가위 맞으시길!